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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by 언덕에서 2009. 10. 30.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1983)

 

 

 

 

 

 

 

 

 

 

 

이 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 곽재구 시인(1955 ~ )의 등단작이다.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이 아니다. 이 땅엔 없는 '역명'이며 시를 살리기 위한 시인의 의도된 선택일 뿐이다. 그의 시에서는 이름 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의 사랑과 슬픔이 응축되어 표현되고 있고, 이를 통하여 민족 정체성을 위협하는 정치적 상황에 맞서는 강력하고 넉넉한 정신을 드러내면서 역사의 현장에 몸 붙이고 사는 젊은 가슴의 함성이 배어 있다. 여기에는 이 시대의 진정한 화해와 사랑을 위한 기도가 담겨 있다. 이 시가 실린 그의 처녀 시집 <사평역에서>는 고통 받는 민중의 억압된 삶을 서정적으로 승화하였는데, 1983년 5월 초판을 발행한 뒤 10만 부가 팔리는 스테디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알뜰하게 사람 사는 얘기를 서정적인 필치로 엮어내고 있는 이 시는 1980년대의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정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의 화자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시행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여행은 조금은 쓸쓸하고 우울해 보인다. 이 시를 모티브로 하여 시인의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는 비슷한 제목의 단편을 쓴 바 있는데, 그 소설에서 1인칭의 화자가 수배중인 운동권 대학생이었음을 참고하면 이 시를 재미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그가 어두운 분위기의 여행을 하고 있음은,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라는 서정적 표현에 의해 뚜렷이 드러난다. 이 표현은 이 시의 처연한 분위기에 주춧돌을 이루는데, 마지막에는 약간 변주되어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조용히 지난 일을 떠올리며 톱밥난로에 톱밥을 던져주는 젊은 남자, 이 장면은 이 시가 이룩한 하나의 서정적 성취의 중심에 있다고 할 만하다.

 

 특급열차가 서지 않는 변방의 낡은 간이역을 상상해 보자. 그 역사의 바깥을 채우며 눈은 내려 쌓인다. 그리고 막차를 기다리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난로가 지펴져 있는 극적 공간에서 시인은 시적 경구를 생산해 내는데, 그것은 `산다는 것은 때론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살다보면 조용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게 될 법도 하다. 이 시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사색과 응시의 필요성을 인식시킨다. 그의 시에서는 이름 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의 사랑과 슬픔이 응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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