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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by 언덕에서 2009. 10. 29.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1908 ~ 1953)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ㅎ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 [조선지광] 83호(1929. 2) -

 

 

* 피오닐 : 러시아 말로 영어의 pioneer에 해당됨. '개척자, 선구자' 라는 뜻과 함께 '공산소년단원'(9세∼14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이 시는 카프 계열의 최고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1908 ~ 1953)의 초기 대표작이다. 끈기있게 읽다보니 1980년대 대학가의 벽에 붙어있던 대자보를 연상시킨다. 님을 위한 행진곡...... '동지는 간 곳없고 깃발만 나부껴~' 라는 노래가사가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라는 구절에서 연유하였음을 알겠다.  임화(林和)는 시로 시작해서 문단에 알려지고 카프 계열의 최고의 이론가이자 실권자로 활동하여 해방 후에는 좌익 문학계의 거두로 활약했다. 그후 월북하지만, 6ㆍ25 후의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박헌영과 함께 사형당한다. 그의 내면과 그의 생애 속에서 그 명석한 모순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면서 임화의 생애는 잡히지 않는 근대성을 향해 나아가는 파멸의 길을 걸어갔다. 시적 진실과 정치적 정의(正義), 가출한 모던보이의 모더니즘과 현해탄 너머 적도(敵都)로부터 수입된 유물변증법, 민족의 문학과 계급의 문학, 시인의 운명과 혁명가의 운명, 정치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식민지 현실과 정치 권력의 창출을 향해 청춘의 열정을 몰아대는 계급투쟁의 논리 사이에서 임화의 생애는 비극의 장관을 이루며 무너졌다.

 

 그의 문학은 그 동안 남ㆍ북한 양쪽에서 다 소외받아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계급주의 문학을 도외시하고는 한국 문학을 온전히 알 수 없고, 특히 임화를 모르고서는 계급주의 문학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그가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예술성을 소홀히 하였다는 후대의 박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성의 부족이라는 잣대로 계급주의 문학을 평가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오늘날엔 비판받고 있기도 하는 것이므로, 이들의 작품을 무조건 예술성이 뒤떨어진다고 하여 작품 자체의 의미를 축소시켜 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주의 문학은 일제 식민지가 낳은 일종의 저항 문학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임화를 비롯한 카프계열 식자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문학을 통한 정치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자면 문학은 선전ㆍ선동의 도구로서 우선 간주되는 것이므로, 얼마나 이러한 목표에 충실하였는가가 작품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작품이 무조건으로 예술성을 배척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예술성보다는 사상성을 그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기인한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는 <네거리의 순이>와 함께 임화의 대표작으로 <카프> 계열의 단편 서사시이다. 작품의 내용 속에는 강한 계급의식과 함께 현실에 대한 투쟁 또는 개혁 의지가 담겨 있다. 연초(煙草) 공장 직공으로 있던 오빠가 노동 투쟁으로 감옥에 간 뒤에 어린 남동생과 편지 봉투 만들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느끼는 오빠에 대한 애정을 편지 형식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서두에 소개한 것처럼 임화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임화의 아내인 소설가 지하련의 삶은 더 비극적이다. 지하련은 1947년 남편과 함께 월북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만주에 피난차 머물고 있다가, 임화의 시신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실성한 상태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하련은 거창에서 몇 천 석 쌀농사를 하는 부잣집 딸로 태어났으며 동경소화여고, 동경경제전문학교에 유학했다. 작품 <도정>으로 최초의 조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미모의 엘리트를 나꿔챈 남자는 임화였는데 그는 전처 이귀래와 동거 중 이었으니 재혼이었다. 당시 임화는 예술동맹의 총수의 위치에 있었다. 프로로 전향하기 전에 필명을 임다다라고 할 정도로 다다이즘으로 출발한 세련된 댄디보이였다고 한다. 조선의 모든 문예 이론가들을 거꾸러트린 논객이었으며 카프 동맹의 서기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제의 스파이란 죄목으로 북에서 총살당해야 했다. 사랑하던 연인을 따라 나섰던 지하련은 만주에서 남편의 스파이 혐의와 숙청, 사형집행의 비보를 연달아 접해야 했다. 이 비련의 여성은 실성상태에서 두만강을 헤메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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