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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유리창 / 오정환

by 언덕에서 2009. 10. 13.

 

 

 

유리창

 

                         오정환

 

우리가 얼굴 맞대고 정성스레

입김불어대면,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좋지 않으랴, 모두들
안에서만 내다보지만

우리가 서로 눈짓하는 의미를

누가 알아내랴, 바람불어

내가 흔들린다면 너는 흔들리는

나를 위하여 또 입김을 불 테지

더럽고 칙칙한 어둠도, 스치는

그림자도 우리는 투명하게 걸러내고

반짝이며 웃는 이빨, 고운

입술로 만나자

풀빛, 하늘빛 깨끗한 그리움으로

 

- 시집 <물방울 노래> (도서출판 신생 2004)

 

 

 

 

 

  

위 시가 누구의 시냐고? 월북시인 오장환(吳章煥 : 1918 ~ 1951)이 아닌 오정환 시인(1947 ~ )의 시집에서 골라보았다. 비교적 유명하지 않은 시인의 시를 고르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이셨기 때문이다. 선생님과의 과거사(過去事) 여행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국어선생님이 아프셔서 결근하시고 새로 부임하신 총각선생님이 수업시간을 메우게 되었다. 그 선생님이 위의 시를 쓰신 분이다. 160cm가 될까 말까한 단구(短軀)에 단아한 얼굴을 한 귀공자 타입의 20대 후반의 젊은 선생님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얼굴은 영화배우 이범수를 닮으셨다. 선생님은 그 한 시간을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사담(私談)으로 적당히 보내셨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산의 모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청소년 문예지 '학원(學園)'지의 문학상에 응모하여 ‘장원’ 상을 받게 되었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현. 중앙대 문창과)에 특차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수인 서정주, 김동리 같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교직에 몸을 담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경북 문경의 어느 사립여자고등학교였다. 여자학교의 총각선생이어서 그랬는지 아침에 출근하면 교무실 책상 위의 화병에는 항상 꽃이 꽃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날은 화병에 꽃이 담겨있지 않고 대신 책상 위에 커다란 수박이 한 덩어리 놓여 있었다. 그때 함께 출근한 교사들이 그 수박을 보더니 "이게 뭐꼬? 시원하겠는데!"하며 주먹으로 수박을 "퍽!" 깨어서 나누어 먹는 바람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나이 어린 여학생이 1~2 시간을 걸어서야 등교가 가능한 거리에서 수박까지 들고서 여름날 얼마나 힘들게 등교를 했는데 그 수박을 한 주먹에 깨어서 먹어버리다니……. 그러나 시골 사립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직(職)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학교 재단 측에서 끊임없이 부당한 잡부금을 학생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유와 정의에 불타는 젊은 시인에게 용납될 수 있겠는가? 교직원 회의 자리에서 교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과연 교육자야? 부끄럽지도 않아!" 그 일로 사표를 쓰고 부산에 위치한 또다른 사립학교 재단에 부임을 하신 것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를 마칠 때 수업 종료 벨이 울리고 선생님의 "땜빵" 수업이 끝났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당시에는 학생에게 학교 선택권이 없었다. 교육청에서 배정해 주는 대로 가야만 하는 것이 당시의 제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부산의 전통적인 명문학교인 K고교나 B고교에 배정되길 내심 원하였으나 불운하게도 내가 다니던 D중학교와 같은 재단인 D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D중학교에서 D고등학교로 배정되었으니 실망이었다. D사학재단은 한 울타리 안에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여중학교, 남자 중학교, 여자상업고등학교, 남자 인문계 고등학교 등 6개의 학교를 거느린 시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사립학교였다. 이사장(理事長)은 정치인이었는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 내에서도 비주류인 JP(김종필)계열이어서 더 이상 공천을 받지 못하고 전직 '2선 의원'의 명함을 가지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위, 조카 등 친인척들이 학교 내의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교사들 중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무자격 교사들도 상당한 수 적발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다. 개그맨 이경규씨의 출신 고등학교라고 하면 간단한데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고 있다니 원…….

 

 고등학교 첫수업이 국어시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국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중학교 때 '땜빵 수업'을 하셨던 그 분이었다. 같은 사학재단(私學財團)이었기 때문에 2년 전에 이미 고등학교로 전보하여 오셔서 자리를 잡고 계셨던 것이다. 3년 전의 젠틀(gentle)한 귀공자 분위기는 이미 사라지고, 큼직한 몽둥이를 든 채 학생들을 응징하는 '별종 파이터(fighter)'로 변신하셨던 것이다. 그 후 3년 동안 수업을 받을 때마다 느꼈던 거지만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수업 분위기, 참고서를 그대로 대독하는 듯한 고리타분한 수업진행으로 학생들로부터 '개성만 대단하고 실력은 별로인 교사'로 낙인을 받으셨다. 그러나 수업시간 간간이 들려주셨던 문학과 문단이야기는 문학도(文學徒)였던 몇몇의 학생들에게는 나름대로의 활력소가 되었던 것 같다. 서라벌 예대 동기생인 송기원 시인(당시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이었다)에 대한 교우담, 스승인 김동리. 서정주로부터 받은 가르침, 미모의 여류문인 강신재. 정연희 선생을 만났던 일 등을 이야기 해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일 년이 지난 고2 때였다. 국어시간은 체육시간 다음 교시로 편성되어 있었다. 몸이 약한 3학년 우수 학생들의 체력장 시험을 체육선생님의 지시에 의해 (사실은 교장의 지시에 의해) 2학년 학생 중 튼튼한 친구 몇 명이 대신 치뤄야만 했다. 물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관례였다. 예비고사에 체육이 20점이나 배정되어 있고 공부를 잘하던 학생들은 대부분 몸이 허약했으니 체육점수만 만점을 받는다면 그들의 S대 입학은 훨씬 수월해지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S대 입학생을 몇 명 배출했느냐가 학교서열 평가의 척도였다. 그날도 '튼튼이' 몇 명이 ‘애교심(愛校心)’이라는 명목 하에 3학년 대신 턱걸이와 1000M 달리기 등을 하고 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교실에 돌아와 국어수업을 준비했다. 수업시작 종이 울리고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의 표정은 비장했다. 땀을 흘리고 있는 친구들을 일일이 지적하시며 교단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6명 정도였을까? 선생님은 윗도리를 벗으시고 와이셔츠 소매를 거지신 후 본격적인 '타작'에 들어갔다.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유 없이 맞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 않겠는가? 체육선생님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데 이렇게 심하게 때리시다니 말이다. 한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되었다. 지켜보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났다. 겨우 160cm가 될까 말까한 단구의 선생님이 180cm가 넘은 거구의 제자들을 타작하는 모습이 흡사 고목나무에 매미가 매달린 모습의 코미디 극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 학교에서 몇 년간 쌓은 선생님의 주먹 내공은 대단했다. 학생들은 거의 묵사발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켜보던 학생들은 동료들이 맞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이 잘못하면, 너희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거야! 젊은 놈들이 이렇게 썩어 있어도 돼? "

 

 아, 나름대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그런거구나. 선생님은 독재정권의 불합리함에 대하여 늘 통탄하셨는데 대학에 진학 후 모교 출신 운동권이 타 학교에 비해 유달리 많음은 (그게 좋던 나쁘던 간에) 선생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이 일정 부분 있었다고 생각한다.

 

 며칠 후 실시된 기말고사에서 선생님이 출제한 문제가 애매해서 내가 이의(異意)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여러 권의 참고서를 자세히 살펴본 후 선생님의 답안이 오답임을 주장하며 나름대로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완곡하게 출제한 문제의 정당성을 주장하시다가 내가 끈질기게 오류를 입증하니 또다시 고함을 치셨다.

 

 "맞다면 맞는 거지. 왜 말이 많아!"

 

 선생님이 행하시면 정의(正義)요, 내가 하면 생떼니……. 하하, 내가 당시의 선생님보다 훨씬 많은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보니 그런 거다.

 

 또 생각나는 건……. 당시 국어교과서에는 국사학자 이기백 교수의 수필이 게재되어 있었다. 저자를 소개하면서 '존경할 만한 아주 근사하고 멋있는 분'이라는 극찬을 하셨다. 이기백 교수는 친일파(親日派) 이병도 교수의 수제자로 우리 사학계를 식민사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평을 받는 또 다른 장본인이다. 이병도는 우리민족의 정신과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서는 일본역사연구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으며, 우리의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를 신화화하고 역사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에 적극적인 참여를 했다. 현재 많은 대학에서 국사 교과서처럼 사용되어지는 한국사신론의 저자인 이기백은 바로 이병도의 맥락을 그대로 이어가는 식민사관의 견해를 갖고 있다. 아마 당시에 선생님은 민주화에 지대한 관심이 많으셨던 관계로 역사학이라는 장르에는 아주 무지하셨나 보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0년 1월, 선생님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에 당선되셨다. 신문을 보던 우리는 선생님이 이전에 그런 곳에 서너 번 당선된 줄 알고 있었던바, 의아했었다.

 

 몇 주 전 저녁, 지상파 텔레비전의 지방뉴스를 보다가 어떤 시민단체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어 잠깐 화면에 잡힌 노안(老顔)의 선생님을 발견하고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았다. 시집에 수록된 글 중 비교적 마음에 드는 위의 시(詩)에 대해서는 별도의 시평이나 감상문을 적지 않겠다. 제자가 스승의 글을 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충이요, 결례(缺禮)이므로. 그나저나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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