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 박세영

by 언덕에서 2009. 10. 1.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박세영

 

장마물에 파진 골짜기,

토막토막 떨어진 길을, 나는 홀로 걸어서

병풍같이 둘린 높은 산 아래로 갑니다.

해 질 낭이 멀었건만,

벌서 회색의 장막이 둘러집니다.

 

나의 가는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멀리 산아래 말에선 연기만 피어오를 때,

나는 저 마천령을 넘어야 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 산을 넘다니,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 리라도 돌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터진 북쪽을 바라보나,

길은 기어이 산 위로 뻗어 올라갔습니다.

 

나는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산 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이,

나의 마음은 떨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빠삐론 사람처럼,

칼을 빼어 든 무녀(巫女)처럼,

산에 절할 줄도 몰랐습니다.

 

나는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겼습니다.

불긋불긋 이따금 고갯길 토막이 뵈는 듯 마는 듯,

이 몸이 어디로 가질지도 모르는, 사로잡힌 마음이여,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갑옷을 입은 전사(戰士)와 같이,

성난 이리와 같이,

고개길을 쿵쿵 울리고 올라갑니다.

거울 같은 산기슭의 호수는 나의 마음을 비쳐 보는 듯,

올라가면 오를수록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습니다.

 

나는 마천령 위에서 나의 오르던 길을 바라봅니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W자, I자, N자,

이리하여 나는 승리의 길, WIN자를 그리며 왔습니다.

 

모든 산은 엎디고,

왼 세상이 눈 아래서 발버둥칠 때,

지금의 나의 마음은 나를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되었습니다.

 

이 장쾌함이여,

이 위대함이여,

나는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학등>(1936. 3)-

 

*

<마천령> : 함경남도 단천(端川)과 함경북도 성진(成津) 사이의 고개. 해발 725m.

<해질 낭> : 해 질 양, 해가 지려 하는 것.

<빠삐론> : 바빌론

 

 

 

 

 

 

 

 

 

 

 

 

 

마천령은 마천령 산맥에 위치한 고개를 의미한다. 마천령 산맥은 함경남도와 함경부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다. 두류산과 소백산(남한의 소백산이 아님)과 같은 2,000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많다고 한다,

 박세영(1907∼1989 )의 대표작인 이 시는 우리 시문학사에서는 아주 드물게 식민지 시대 혁명 전위(前衛)의 역사적 전망을 뚜렷이 보여 주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계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는 기존의 여성적 편향의 고향 상실을 노래하는 작품이나, 북방 정서를 바탕으로 유랑민의 비애를 노래하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혁명 의지와 역사적 전망이 강하고 장중한 남성적 어조를 바탕으로 형상화되어 있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좌익 계열의 시로 손꼽힌다.

 

 시적 화자는 지금 오후의 마천령을 넘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등정의 길을 따라 구성된다. 시적 화자는 1연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2연에서는 어느새 마을이 산 아래 놓여 있는 위치에 올랐으며, 5연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험한 마천령을 넘어서 6연에서 드디어 그는 마천령 위에 올라 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가 힘들게 올라온 꼬불꼬불한 길은 위에서 내려다보니, 영어의 W자 I자 N자 등으로 생겨 마치 WIN의 의미로 보인다. 이는 시적 화자의 성취감과 전위의 혁명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이 시의 주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망이 확보되었을 때, 시적 화자의 마음은 자신을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마음껏 '장쾌함'과 '위대함'을 느끼고, 결연한 의지로서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직접 '나'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감 없이 산을 오른다. 그의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그는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리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며,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산 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 마음이 떨린다. 그러면서 그는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 먹으며 자신을 반성해 본다. 그리하여 그는 강한 의지로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약한 패배주의적 감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비록 그는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북쪽'으로 활동 중심을 옮기고 있지만, 이제는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아 갑옷을 입은 전사와 같이 성난 이리와 같이 고갯길을 쿵쿵 울리고 고개를 넘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그는 '장쾌함'과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경기도 고양 출신인 박세영은 1924년 가을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염군사 동인들과 교유하면서 사회주의 문학관을 다져갔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편입함과 동시에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맹원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치하 대표적이 좌익시인인 그는 그의 이러한 문학적 경향을 바탕으로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ㆍ시분과위원ㆍ아동분과위원 등을 지내다가 1946년 6월에 월북하게 된다. 월북작가 중 숙청 당하지 않은 소수 중의 한 명이다. 월북 후 그는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출판부장과 중앙상임위원을 거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ㆍ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국가상임위원ㆍ조국평화통일 상임위원ㆍ작가동맹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북에서 출간한 시집으로는 <진리>(1946) <승리의 나팔>(1953) <박세영시선집>(1956) 등이 있다. 이외에도 <밀림의 역사> 등을 창작하여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북한의 ‘애국가’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영랑  (0) 2009.10.05
사향(思鄕) / 김상옥  (0) 2009.10.02
추억(追憶) / 조병화  (0) 2009.09.30
저녁눈 / 박용래  (0) 2009.09.29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0) 2009.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