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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저녁눈 / 박용래

by 언덕에서 2009. 9. 29.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월간문학>(1966)

 

 

* 말집 :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

 

 

 

 

 

 

 

 

 

 

 

박용래 시인( 1925 ~ 1980)의 시는 점차 사라져가는 한국 농촌과 자연의 풍물에 강한 연민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이 전통적 . 애상적 정서에 힘입어 독특한 토속 미학을 형성한다. 이 시에서 겨울에 여행을 떠난 화자는 저녁때가 되어 허름한 주막에 찾아 든다. 저녁을 먹고 우연히 바깥을 바라보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가하던 주막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바빠진다. 주막임을 표시하는 희미한 호롱불과 마굿간에 매어 있는 조랑말의 수선스런 움직임, 온종일 짐을 지거나 주인을 등에 태워 고단하고 시장할 조랑말을 위해 부산하게 여물을 준비하는 주인들이 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바쁨 속의 한가함 혹은 한가함 속의 바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적이 끊긴 허허벌판에서 휘몰아치는 눈발을 묘사한 마지막 연은 날이 새면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길손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길손은 우리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 해가 저무는 겨울, 그리고 하루의 바쁜 일상을 마감하는 저녁, 온 세상을 흰색으로 뒤덮으며 내리는 눈발은 나그네의 외로움, 회한, 애상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화자는 붐비는 눈발 속에서 지나온 한평생을 돌아보고 감상에 젖기보다 무덤덤히 눈발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화자의 눈에 비친 주막의 풍경은 바쁜 듯하지만 전혀 바쁘지 않다. 오히려 늦은 저녁의 함박눈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하다. '붐비다'란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에도 전혀 바쁘다는 느낌이 없이 평화롭고 적막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지만 이 부분이 이 시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런 한가함 혹은 여유는 전적으로 화자의 관조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정신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바쁘게 변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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