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by 언덕에서 2009. 9. 28.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ㆍ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1979)

 

 

 

 

 

 

 

 

 

 

 

 

김광규 시인(1941~ )의 시는 대부분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구문(構文)으로 씌어진 일상시(日常詩)이면서도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난해시에 식상한 독자와의 통교(通交)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에 유학한 후 서울대에서 <귄터 아이히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이지만 우리말에 있어서 더욱 자유롭다. 이 시 역시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평이한 표현 방법을 통해 중년기 사내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명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는 화자가 중심이 된 간단한 줄거리가 담겨 있다. 4ㆍ19 혁명이 일어나던 무렵, 젊은 혈기와 '때묻지 않은 순수'로 살던 화자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어느 세밑, 중년의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옛 추억이 서린 곳에서 '동창회' 형식으로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은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기고 전화번호가 달라진 만큼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부와 지위를 얻은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년이 되어 있다. 월급이 대화의 전부가 되고, 물가가 고민의 주종을 이루는 소시민의 중년이 되어 버린 그들은, '늪' 같은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옛사랑'을 노래하던 젊음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포커'나 '춤'으로 대표되는 향락적 세계를 즐길 뿐이다. 그러므로 행여 누가 들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저 '살기 위해 살고 있는’ 소시민적 생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는 꾸밈이 없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점에서 '자연'에 가깝다. 그가 자연을 관조하는 가운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에 접어들고 진리를 감득해내는 것처럼 독자들도 그의 시를 읽고 위안도 받으면서 교훈도 얻어내게 될 것이다. 자연과 같은 시, 김광규는 이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남현)

 

 화자와 옛 친구들에게 순수와 젊음을 반추시켜 주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다만 '플라타너스 가로수'만이 간신히 남아 그들을 반겨 줄 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없는 자신들을 확인할 뿐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라며 꾸짖는 것 같은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는 화자의 무거운 발자국이 있을 뿐이다. 유수 같은 세월 속에 젊음과 열정, 순수와 이상을 잃어버리고 거의 맹목적일 만큼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년의 소시민이 한 발짝 깊숙이 현실 속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 자신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追憶) / 조병화  (0) 2009.09.30
저녁눈 / 박용래  (0) 2009.09.29
도솔가(兜率歌) / 김혜순  (0) 2009.09.26
하늘 / 박두진  (0) 2009.09.25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0) 2009.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