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by 언덕에서 2009. 9. 24.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 (1962 ~ )은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모든 장르의 글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을 일으킨 혁신적 작가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음란물로 분류되어 사법적 판단의 도마에 오름으로써 다시 한번 세간에 파란을 일으킨 문제적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어머니의 종교였던 '여호와의 증인'의 신도가 되어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 19세 때 폭력사건으로 대구교도소 미결수방을 거쳐 소년원으로 보내져 1년 6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그곳에서 많은 양의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 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이 당선되기도 하였다. 1987년 첫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을 발표하였고, 이 작품으로 제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다.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펠리컨>을 발표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첫 장편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를 출간하였다. 그 후 첫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 장편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1천여 장의 재즈 음반을 수집하며 관심을 가지던 분야인 '재즈'를 소재로 한 소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는 '재즈적 글쓰기'라는 평단의 조명을 받았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음란성 시비로 출간되자마자 출판사측에서 자진 수거하고 결국 그는 구속ㆍ수감되었다. 또한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의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원작과 함께 음란성 시비를 불러일으키며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장정일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해체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주인공들의 도착적인 성관계를 여과 없이 표현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소비사회의 인간적 삶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하는 작가이자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이 시를 읽어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마운' 그늘의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늘은 눈부시지 않고 어둡지 않다. 뜨거운 햇살은 가려주고 비바람도 얼마간은 막아준다. 여운, 깊이, 안식, 편안함을 지녔다는 점에서서 그림자와 다르다. 이 시 속의 그늘 아래 서면, 일상의 복잡함과 피곤함을 잊고 잠시 잊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늘 아래 스스로를 내버려 두고 노동과 불안과 걱정을 제껴두고, 잊거나 잃은 것을 떠올리며 눈물도 짓고안식을 얻는 것이다.

 각박한 21세기의 세상에서 시간과 계절은 너무 빨리 달아나고, 우리는 너무 빨리 늙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항상 배고픔과 실직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리고 출근과 스트레스와 피로와 시름과 술과 담배에 지쳐 있다. 맨땅에 뿌리를 내린 채 사시사철 변함 없는 사철나무의 그늘이니 얼마나 넓고 깊겠는가. 누구나 그런 그늘 하나쯤은 꿈꾸기 마련이다. '가장 장정일답지 않는 시'임에도 가장 많이 애송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의 끝부분에서는 보니엠(Boney M)의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가 나온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편)라는 성경 구절이 연상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탑과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번영의 땅 바빌론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대중가요이다. 바빌론은, '시온(Zion·예수살렘의 도시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을 생각하며 견뎌야 했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이방의 땅, 고난의 땅, 타락의 땅이다. 디스코 풍의 이 노래는, 1980년대 내내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던 공장노동자들의 휴식시간을 장악하기도 했다. 장정일이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을 꿈꾸며 들었다고 하는 '바빌론의 강가'를 다시 듣고 싶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쉴 수 있는 그늘이 필요하지 않은가.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솔가(兜率歌) / 김혜순  (0) 2009.09.26
하늘 / 박두진  (0) 2009.09.25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0) 2009.09.23
즐거운 편지 / 황동규  (0) 2009.09.22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남주  (0) 2009.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