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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비처럼 음악처럼 / 안현미

by 언덕에서 2009. 9. 19.

 

 

 

비처럼 음악처럼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를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배불을 붙어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 시집 <곰곰> (렌덤 하우스 2006)

 

 

 

 

 

 

 

 

 

 

 

 

 

 

아, 이 시는 너무도 아름답고 또 눈부셔 한숨이 나온다.

 위의 시를 쓴 안현미 시인(1972~ )은 거침없고 활달한 상상력에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사용하여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눈부신 시'를 쓰고 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너무 형이상학적이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류의 시와는 좀 다른 시인 것이다. 필자의 과문함 탓이겠지만 어려운 시를 읽을 때는 중간 정도 읽다가 손을 놓아버리는 버릇이 있다. 어렵기 짝이 없는 난해시를 쓰는 ‘미래파’의 일군과는 차별화되는 것은 독특함. 그것은 우리말을 가지고 표현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개성적인 필력이 발휘된 결과이다. 아름다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이 시를 만든 힘은 상상력일 것이다. 상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낯선 곳으로의 유쾌한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기다림으로 점철된 유년의 통로를 시인이 모두 가슴 속에 담고 형상화시킨 결과가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인간은 이렇게 상상을 통해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그 본체인 무한한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시의 정의를 생각해 보자. 시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압축해 표현한 글’이다. 다른 모든 문학 양식의 모체이며, 가장 순수한 정신의 경지를 표현하는 문학 형식인 것이다. 원래는 ‘공상에 의한 생산’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는데, 그것이 차차 한정적(限定的)으로 문학적 생산 전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산문에 대한 율어(律語)의 문학을 가리키게 되어, 결국은 한 문학양식으로서의 시의 개념을 담는 말이 되었다. 정형시, 자유시 등 여러 가지 형식이 있으나, 원래는 가창(歌唱)되었던 것이 노래 부르는 가요와 읽는 시로 분화된 것이다.

 

 위에서 구구하게 시의 정의를 인용한 것은 음악과의 관계 때문이다. 시인은 하나의 그 어떤 음악을 상상하면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음악 중에서도 가창(歌唱)되는 노래일 것이다. 그 음악은 사랑이라고 불렀다가 음악이라고도 불리는 노래 같은 것으로 마음을 새춘천교회의 어느 외딴길 건너편에 세워 두었을 때 어디인가로부터 들려왔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도 언젠가 새춘천교회와 같은 분위기의 장소를 지나다가 문득 아련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을 이 시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 시 속에는 경험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난한 연인이 등장한다. 잡초가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이 보이고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담뱃불을 붙여주는 연인이 보인다. 젊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멋있을 것 같다. (늙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멋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춘천을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다 비애 속에서 맥주를 마셨을 것이다. 시인은 언젠가 그 깨끗한 양옥집에 들어가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연인을 꼬드겨 보고 싶었을 것이다. 꼬드긴다는 말이 주는 여운이 이토록 아름다운 비애를 자랑하는 글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한 달만…. 둘이서…. 살아보자고…. 꼬드겨 보고 싶다는 생각……. 우리도 과거에 누군가의 속눈썹을 훔쳐보며 마음속으로 수십 번 중얼거리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