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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그해 여름 숲 속에서 / 김지향

by 언덕에서 2009. 9. 18.

 

 

 

 

그해 여름 숲 속에서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다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진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문학마당> 2008. 여름호

 

 

 

 

 

 

 

 

 

 

 

 

 

여름이 지나갔다.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 장마와 폭염으로 대변되는 기나긴 여름은 아침저녁 찬바람이 슬며시 불어올 때 우리곁을 떠난다. 지난 여름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지향 시인(1938~ )의 시세계의 특징은 시각적 이미지의 환상적 결합에 의한 언어의 명징성(明澄性)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시적 자유분방함(이를 흔히들 '에스프리'라고 부른다)이 독특한 지적구조를 통하여 심도있는 내면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적인 정취(리리시슴)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천성적일 수도 있고 오랜 시작에서 오는 노력의 소산일 수도 있는 감각의 발달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위의 시는 세상을 향한 특유의 다양한 시각과 다층적 정서를 힘껏 펼쳐보인다.

 

 숲에서 바람이 잠잠해짐을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라고 표현하며 나뭇가지에서 바람이 불어옴을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고 서술했다. 이 정도면 국보급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아닐까 한다.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시정(詩情)의 수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만큼 자주 다루어진 시의 소재도 흔치 않다. 시인은 그 '사랑'을 자연에 승화시켜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거느리고 있는 다양하고 풍성한 감정과 사유의 빛깔 때문일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사랑하는 대상인 `자연'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한다. 그것의 이름은 산새, 나무가지, 바람 등이다. 변치않는 자연의 이름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도 명성이 상하는 법 없이 빛난다. 혹 누가 그 이름을 더럽히거나 그에게 모욕을 가하려 하여도 가하는 자의 손만 더러워질 뿐 그의 이름은 낡지 않다. 시의 화자는 `자연'을 사랑으로 충만한 눈길로 승화시켜 그해 여름 숲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에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청정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