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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세상 처음 / 하종오

by 언덕에서 2009. 9. 5.

 

 

 

세상 처음

 

                                                   하종오

 

우리 세 살 짜리 빈영이

햇빛 한 줄기 쬐며

중얼중얼 입 속 노래 불렀지요

앞뜰에 온갖 꽃들 피던 봄에 불렀지요

앞뜰에 온갖 꽃들 지는 가을까지 불렀지요

콩콩콩 뛰며 부르다 부르다 꽃 다 지고

그 사이 배운 말 한 마디 뱉았지요, 씨발 !

꽃에게도 씨발 하늘 보고도 씨발 씨발씨발

씨발까까 씨발밥 씨발우유

줘요오 씨발돈

고것참 고것참

우리 세 살 짜리 빈영이

 

 

 

-시집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푸른숲 1989) 

 

 

 

 


 

하종오 시인(1954 ~ )은 모진 내공과 끈기가 요구되는 서사시에 매달려왔다. 그의 작품에는 설익은 구호나 이념이 없다. 시의 본질과 정신을 반추케 하는 그의 시편들은 언뜻 보면 담백하게 느껴진다. 반짝거리거나 요란하지도 않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소품 한 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아주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음은 신문에서 본 내용이다. 누군가가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 몇한테 집에서 평소에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을 세 개만 써보라는 숙제를 하나 던져준 적이 있었나 보다. 그 중 한 아이가 첫 번째로 쓴 것은 ‘꼴배기실어‘이었다고 한다. 아마 아이가 미운 짓을 할 때 꼴 보기 싫다는 말을 자주 했던 모양이다. 이 일을 알고 난 후 엄마는 다음부터는 그 말을 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인데 우리집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학생들 모두에게 '가훈'을 적어보라고 해서 나름대로 기억하고 있는 우리집 가훈을 적어서 제출했다고 했다. 큰 아이가 제출했다는 우리집 가훈은 '눈치껏 살자'였다. 아, 이런……. 왜 그렇게 적어냈느냐고 물었더니 엄마에게서 하도 자주 들은 말이라서 그게 가훈인줄 알았다고 하는데 나는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만화가 고우영 선생이 즐겨 쓰던 격언이 생각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금년에 큰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다. 다른 분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식은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귀여운 짓으로 부모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다가 그 이후로는 평생 부모에게 애먹인다. 즉, 다시 말해서 어릴 때 귀여운 짓을 저축하여 그걸로 평생을 우려먹고 사는 게 자식이다. 아이들을 키워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뿐이다. 하하, 위의 시는 귀여운 짓을 저축한 부분이다.

 아이가 처음 배운 말 한 마디는 어른이 천 개의 단어를 외우고 익힌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 ‘씨발’은 쌍스러운 욕이 아니다. 이것은 천진무구한 동심이 발음하는 하나의 노래, 하나의 숨결 같은 것이 아닐까? 악의가 가득 찬 세상에서 이렇듯 아이는 늘 어른의 아버지이다. 이 점을 깨닫게 해주신 고우영 화백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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