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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비옷을 빌어입고 / 김종삼

by 언덕에서 2009. 9. 4.

 

 

 

비옷을 빌어입고

 

                                                          김종삼(金宗三. 19211984)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 팔 년전

선죽교가 있는

비 내리던

개성,

 

호수돈 고녀생(高女生)에게

첫 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어입고 다닐 때

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시집 <십이음계> (삼애사 1969)

 

 


 


 이 시인은 클래식음악의 전문가, 그 중에서도 바하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적 생활력은 없었으면서도 고상한 취미를 가꾸어 갔다. 때 묻은 옷을 싫어하고 와이셔츠도 고급으로만 입고, 소주를 마신다 하더라도 빈대떡 대신 조개 하나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가장 혐오한 것이 속물근성으로 어느 직장에 있을 때는 아첨배를 박치기하다가 그것이 빗나가 지프차를 받는 바람에 머리에 열 바늘 가량이나 상처를 꿰맨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공에 투철하면서도 거창학살사건 때는 울면서 시를 쓴 적도 있다는 그의 시는 무척 짧은 것이 특징이다. 보들레르가 ‘긴 시는 짧은 시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다.’고 말한 것을 그대로 시작(詩作)에 옮기듯이 말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특이한 시 소재의 사용과 표현기법의 단절ㆍ비약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의 시세계는 동안(童眼)으로 바라보는 순수세계와 현대인의 절망의식을 상징하는 절박한 세계로 나눌 수 있다. 현실세계와 거리를 둔 채 고독한 내면의식을 바탕으로 순수지향의 시의식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것과 거리를 가지는 이상세계를 그려내는 그의 언어는 아름답고 간결한 동시에 체념적이거나 암울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고도의 비약에 의해 어구들 연결시키고 울리는 음향효과를 살린 시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는 철저하게 보헤미안이었고, 무산자(無産者)였고, 생활인으로서 철저한 무능력자였다. 그의 인생에는 생활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와 음악과 술이었다. 그는 단지 시인일 뿐이었다. 때로 그는 자조적으로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라고 내뱉었다. <제작(製作)>이라는 시에서 ‘그렇다 / 비시(非詩) 일지라도 나의 직장은 시이다’라고 선언했듯이 그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시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김종삼 시인의 가장 아름다운 시편의 제목이기도 한 ‘묵화(墨畵)’처럼, 적막하게 번져가는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하루 종일 비 내리는 날, 가까운 데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따라 지나간 추억들이 하나 둘 번져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분단이 되기 전의 북쪽 땅 개성(開城)에서 만났던 한 여고생을 향한 사랑과 실연의 기억이 빗속으로 연결된다. 비옷마저 빌어 입고 다녔던 가난의 기억도 빗소리를 따라 흘러간다. 그때도 담쟁이가 우거진 기숙사의 기와 담장 위로 하루 종일 비는 내리고 트럼펫 소리가 들렸나 보다.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비를 타고 흘러 번지는 아름다운 소품이다.

 연애시에는 한없이 인색했던 그는 나의 연인은 내가 살아가는 날짜들”(‘연인’)이라고 했을 뿐인데, 바로 그가 월남하기 전 잠깐 마주쳤던 첫사랑을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구체성으로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니던 28년 전 개성의 호수돈 고녀(高女), 기억 속의 그곳에서는 아마 지금도 비가 내리고 사랑스러운 트럼펫 멜로디가 환청(幻聽)처럼 들리고 있을 것이다.

 개성의 호수돈 고녀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그 학교가 “화강암으로 지어진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제는 건물만 남아 있다는 그 아름다운 학교는 그대로 간직되어 있을까? 호수돈 고녀의 그 여학생은 전쟁통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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