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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by 언덕에서 2009. 9. 3.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이 시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이 있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벅차오르고 뜨거워지는 시이다. 우리 시대에 양심이 살아있고 정의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국보'와 같은 시인 것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엔 많은 말이나 수사보다도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고행 1974>와 인혁당 사건에 관한 내외 신문 기자 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재수감되었을 때, 박정희 정부에서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세웠다. 그 때 김지하는 방대한 분량의 양심선언을 하게 된다.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이다. 내가 가톨릭 신자이며, 억압받는 한국 민중의 하나이며, 특권, 부패, 독재 권력을 철저히 증오하는 한 젊은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 자신을 굳이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나는 이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존재인 김지하 시인은 1970년대를 온통 감옥에서 보내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품고 절규하듯 살아왔다. 군사 정권 아래서 압살당해 온 민주주의를 '너'라고 지칭하며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의 어조가 느껴진다.

 이 시는 유신 체제의 질식할 듯한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의 열망을 절규한 1970년대 초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 1연은 가슴 속에 목마른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이른 새벽 뒷골목에서 남 몰래 써야 한다는 시적 상황 속에 당시의 현실이 핏자국처럼 선연하게 적혀져 있다.

 제 2연은 여러 가지 소리의 중첩을 통해 이 시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발자국 소리'에서부터 '탄식 소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구체적 사건의 서술이 없지만, 오히려 소리들 사이에 있는 무서운 사태가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만든다.

 제 3연에서 화자(話者)는 감옥과도 같은 험한 상황에서의 분노와 비통함으로 흐느끼면서 뒷골목의 나무판자에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쓴다. '뒷골목'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 남 몰래 /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쓸 수밖에 없는 이 대목은 그 어떤 산문적 서술보다 뚜렷하게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 준다

 이 시는 197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1970년대 중반, 이른바 '10월 유신'이라고 불리는 군사 독재 정권의 강압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아 노래한 작품이다. 무력으로 집권한 군사 독재 정권이 자신들의 영구 집권을 목표로 해서 단행한 10월 유신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암살한 계기였다. 시민은 그와 같은 군사 독재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에 맞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부르짖어 왔고, 그로 인해 거듭되는 체포와 구금에 시달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또다시 체포, 구금되는 상황을 맞게 되고, 이 작품은 이른바 불온한 작품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독재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은밀히 읽혀졌고, 급기야는 노래로까지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심어 주었다. 이 시가 널리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우리의 불행한 정치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 없다. 이 시의 문학성 또한 시대성 효용성을 뛰어넘는 '진실함의 절정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는 절실하면서도 자칫하면 추상적인 구호의 수준에 그치기 쉬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생경하고 공허한 구호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읽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반성하게 만들고 있다. 시인 자신의 개인적 서정으로 육화(肉化)시켜서 표현함으로써 깊은 공감대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1970년대 저항시의 정점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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