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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병상록(病床錄) / 김관식

by 언덕에서 2009. 8. 17.

 

 

 

 

 

 

 

 

 

 

                            병상록(病床錄)                                   
                   
                                                                               김관식(金冠植.1934∼1970)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肝, 心, 脾, 肺, 腎.......

오장(五臟)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登錄金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냐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白金)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 시집 <다시 광야(曠野)에서> (창작과비평사 1976)

 

 

 

 

 

 

 

 

 

 

 


 

 

 

 

 

자고로 사모곡(思母曲), 사부곡(思父曲)이 많다지만 죽음을 앞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며 쓴 시는 드물었다. 이 시는 가난한 시인이 병이 든 채 몸져누워 극한에 도달한 자신의 건강상태를 살펴보고 아들딸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유언을 일기형식을 빌려 표현한 애틋한 시이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난뿐이지만 가난함에 주눅 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생전 아버지로서 도리를 해주지 못한 것들이 등록금, 떨어진 운동화로 표현되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더구나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아이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고 있는 장면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러나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날 수는 없는 법……. 인간의 삶이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이고, 백금(白金)은 뜨거운 도가니에 넣어 모질게 단련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됨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사후에 예견되는 고난을 이겨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현(又玄) 김관식(1934∼1970)은 어려서 시 1천 수를 외는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났으며, 한학(漢學) 수학을 하며, 동양고전과 유학(儒學)을 두루 섭렵하였다. 강경농고 졸업 후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을 다니다 중퇴하였으며, 서울상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근처>가 동서지간(同壻之間)이던 미당 서정주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정식 등단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손아래 동서이다.

 이 후 [세계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60년 4ㆍ19혁명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물 정치인 장면(張勉: 후에 총리)과 겨루기 위해 서울 용산 갑구에 출마해 낙선한 뒤,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1970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세속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豪放)한 기질 탓에 문단사(文壇史)에 몇 안 되는 기인(奇人)으로 손꼽힐 만큼 많은 기행(奇行)과 일화(逸話)를 남기며. 문단에서 ‘미친 아이’로 불렸다. 그는 타인의 시에 가식(假飾)이 있다거나 바르지 못하다는 판단이 서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독설(毒舌)을 내뱉었다. 문단의 중진들을 부를 때도 격식과 예의를 차리지 않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에게도 ‘군(君)’자를 붙여 제자 다루듯 대했다. 4ㆍ19혁명에 감격해 국가의 민주화와 발전에 기여한다며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당연히 낙선했다. 그 후 가난한 시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준다며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산동네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파는 등 기행(奇行)을 펼쳤다.

 그는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며 동양고전과 유학(儒學)을 두루 섭렵했다.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었던 까닭에 동양적 가치와 정신세계에 깊은 애정을 갖고 동양적인 감성을 시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정서와 정감(情感)을 지키고 동양적 가치를 긍정하는 시인의 작품들은 자연히 당시의 서구 동경적(西歐憧憬的) 시대 조류에 반(反)한 것으로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그의 작품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의 기행(奇行)은 이러한 흐름과 세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자 반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면이 있다.

 김관식 시인의 아내 방옥례씨의 회상기에 의하면, ‘세검정 산등성이의 술집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술꾼이었다. 미당 서정주의 처제이기도 한 방 여사는 은행원이던 21세 때 세 살 아래인 김 시인을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프러포즈를 받았다. 방 여사가 거절하자 그는 음독자살 소동을 벌이고, 결국 그들은 술처럼 ‘엉망진창’인 결혼식을 했다. 그는 신혼 초부터 술과 아내와 동거하며 교편을 잡았으나, 술에 취해 교단에 서고, 교장 사택에 용변을 보고, 제자들과 ‘왕왕 구락부’를 조직해서 남의 개를 잡아 먹었고, 술에 취해 거의 매일 지게꾼에 실려 집에 왔다. 그래서 자주 학교를 옮겨 다녔고, 그러면서 술 주전자와 술 빈 병을 재산으로 남기고 타계(他界)했다.

 남편이 간 후 방씨는 2남 3녀를 키우기 위해 스웨터 행상, 군화공장 공원, 회사원 등으로 온갖 고생을 해 왔는데, 이즈음 비로소 남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조그만 인생이 되길 거부하는 거인, 천길 벼랑 청솔가지 위에 다리 하나 오그려 젖힌 거만한 송골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송골매 중 가장 억센 송골매’라고 김관식 시인을 표현했다. 그가 말했던 새벽은 어두운 밤 터널을 지나서 죽음 이후에 밝아오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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