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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정님이 / 이시영

by 언덕에서 2009. 8. 4.

 

 

정님이

 

 
                                                                                                   이시영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시집 <만월>(창작과 비평사 1976)

 

 

 

 

 

 

 

 

 

 

 


 

 

 

 

이시영 시인(1949 ~ )의 시는 전통적 서정시 형식에 서사성을 담아내고 있다. 서사성의 세계는 보편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사실성을 획득 할 수 있다. 시인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이러한 기법은 불우한 이웃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정립하려는 노력과 열정의 결과이다. 그의 시는 70년대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토속적인 삶의 긍정적인 모습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 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들 ―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그늘에서 생겨난 비참한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 주고 있다. 명랑, 쾌활하고 순박하기만 했던 정님이가 식모로, 방직공장 여공으로, 색시집의 창녀로 전락해 갔던 당시의 사회 문제들을 부각시키면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무력하고 왜소하기만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 있다.

 이시영은 한국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의식과 예술 의식을 탄력 있게 조화시킨 교과서와 같은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 세계는 대체로 민중적 현실에 바탕을 둔 비판의 목소리가 주조를 이룬다. 1970년대의 폭압적 정치 현실에 저항하던 민중들의 삶과 사상을 서사적인 골격의 이야기를 가진 '이야기시'로 독특한 리얼리즘 시의 경지를 개척하던 그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짧은 서정시를 통하여 민중들의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여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새롭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위의 시는 이시영 시인의 이야기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교직(交織)시키고 있다. 우연히 마주친 용산 역전 밤거리의 한 여인을 통해 화자는 추억 속의 '정님이'를 떠올리게 됨으로써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농촌 공동체의 달콤한 회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러나 무정한 현실로 복귀하는 이 시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결국은 그 달콤함도 잠시만의 행복으로 그치고 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이 시의 사실적 묘사는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여러 문제점, 즉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그늘 속에서 파생된 비참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명랑하고 순박하기만 했던 '정님이'가 식모로, 방직 공장의 여공으로, 다시 영등포 색시집의 창녀로 전락해 가는 삶의 여정은 바로 70년대 후반까지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소녀들의 무작정 상경'을 상기시키는 한편, 리얼리즘 문학관의 기본이 되는 '환경 결정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처럼 '정님이'도 '변두리 인간(marginal man)'이 걷는 삶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준다. 물론, 이 시에서 그녀가 정말 '정님이'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라며 단정하지 않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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