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인생아 / 박찬

by 언덕에서 2009. 8. 5.

 

 

 

 

인생아

 

                                                                                                                박찬

 

많이들 바쁜가본디 어서들 싸게 가보쇼,

나는 그냥저냥 가는둥 마는둥 갈라요.

장다리 밭에 노닐며 장다리꽃 따먹다,

아지랑이 어질어질 나비따라 가다가,

뒷동산에 올라 송홧가루 얼굴에 분칠도 하고,

아카시아꽃 훓어먹다,

들에 내려가 자운영 다복습 논두렁에 앉아

꼴인 보릿대 꺽어 보리피리 불면서

놀다가 갈라요,

그렇게 노닐다 싸목싸목 갈텡께,

빨리오라 늦게오라 궁시렁 마쇼.

이리가도 저리가도 결국은 가는 길인디,

무어 할라고 그리 바쁘게도 종종 거린다요.

그래도 먼저 간곳 북적거리거든,

내 자리도 하나 봐서 남겨 주었으먼 쓰겄소.

 

꽃상여 단풍든 산넘어가네,

산 넘어 눈 쌓인 산마을 닿거든,

지친몸 거기 퍼지게 누웠다가,

한 바람 눈 밭에 어디든 휘날리리.

 

 

 -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 (문학동네 2008)

 

 

 

 

 

 

 

 

 

 

 

 


 

 

 

위의 시는 2007년 1월 세상을 떠난 박찬 시인(1948~2007)의 유고 시집에서 발췌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무엇일까? 가장 절실하게 말했으므로 가장 기쁘게, 눈물겹게 남을 말은 무엇일까. 삶이 그린 만화경, 그 모든 인연의 최후는 무슨 말이라야 할까. 그 말은 “개화산 미타사 미륵불 아래” “별빛”처럼 필 것이다. 시인은 이 시집 도처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시인의 임종 순간을 문예지 기사를 통해 접한 적이 있다. 아내와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만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랑!’, 그 한마디 말만 꽃처럼 골라 물고 그는 “흰 구름 둥둥 여여하”듯 그렇게 고요히 떠나갔던 것이다.

 위의 시 '인생아'는 전라도 사투리를 시어로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이다. 경상도 사투리 시의 대표작이 박목월의 '이별가'라면 전라도 사투리 시의 그것은 박찬의 '인생아'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는 말년에 시인이 자신의 인생을 개관하고 인생역정을 정의하기 위해서 쓴 시로 보인다. '이리가도 저리가도 결국은 가는 길인디, 무어 할라고 그리 바쁘게도 종종 거린다요.' 부분에 있어서는 인생의 본질의 꿰뚫어보는 시인만의 달관된 시선이 드러난다. 그래서 전체적인 흐름은 슬프다.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단풍든 가을 산에서 눈 쌓인 겨울 산마을로 이미지가 전환된다. 가기 싫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 그러나 단풍들고 눈 나리는 아름다운 산하이기에 별 미련과 아쉬움 없이 어디든 휘날릴 수 있는 넉넉함과 푸근함을 시인은 잘 전달해주고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자연적인 죽음의 경계선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다. 그의 시적 추구의 본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하면서도 그 이분법적 틀 속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영생하는 대자연의 법칙과 순리대로 흘러가야 할 ‘도(道)’의 세계와 비슷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그 끝에서 홀로 붉게 타는 칸나여, 안녕!

다시는 못 볼 푸른 하늘이여, 너도 안녕!

 

-「소리를 찾아서 -서래봉 가는 길」 전문

 

 이 시집을 다 읽고 책장을 덮기 전, 맨 마지막에 실린 「소리를 찾아서-서래봉 가는 길」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면, 붉은 칸나에게도 푸른 하늘에게도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고하고 뒤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안녕'이라는 단어와 함께 홀연히 떠나면 되는 그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하는가.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0) 2009.08.07
효도(孝道)에 / 마광수  (0) 2009.08.06
정님이 / 이시영  (0) 2009.08.04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0) 2009.08.03
조등(弔燈)이 있는 풍경 / 문정희  (0) 2009.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