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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8

이시영 여섯 번째 시집 『사이』 이시영 여섯 번째 시집 『사이』 1996년 간행된 이 시집은 짧은 시행에 서늘하고 인상적인 서정 시편들을 선보여온 이시영(1949 ~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세간의 구속과 얽매임에서 벗어난 정밀(靜謐)한 마음이 자연의 정신과 만나 우주와 인생, 인간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 2014. 4. 28.
사라진 고향 사라진 고향 <내외동의 연지공원. 내가 어릴 때는 연지못으로 불리던 곳인데 소먹이던 곳이다> 내 고향의 행정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내동이었는데 그 지명은 근래에 김해시 내외동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제법 큰 농사를 지으셨는데 머슴을 셋이나 두었다. 큰 머슴, 작.. 2013. 9. 27.
시월 / 이시영 시월 이시영 (1949 ~ )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 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아놓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봇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 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2005년 현대시학 11월호)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입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지요.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시적 감성을 새롭게 변용시켜 신선한 시각으로 절실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에서는 시대와 사회 현실.. 2012. 10. 22.
바람이 불면 / 이시영 바람이 불면 이시영 (1949 ~ )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슬픔은 아직 우리들의 것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 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을 보고 걸었다 - 시집『滿月』창작과비평사 1976. 35쪽 이 시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입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지고 맑은 서정이 넘치는 자연 서정시를 많이 썼지요. 원래는 시조를 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시마다 운율이 살아 있어서 읽기가 참 좋습니다. 시인은 시조의 수련에서 얻어진 언어적 절제력을 통해 전통적인 .. 2012. 1. 9.
강회(江淮)의 우정 / 이시영 강회(江淮)의 우정 이시영 (1949 ~ ) 삼국지 권(券) 10에 보면 오의 진동장군 육항(陸抗)과 진의 도독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에 주둔하면서 적으로서 서로를 넘보면서도 깊은 신뢰로 덕을 나누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나온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가 두 장군이 마주쳤으나 엄중히 상대의 경계를 넘지 않았으며 저물어 군중에 돌아와서는 잡은 짐승들 중 오의 화살을 먼저 맞은 것들을 양호가 모두 吳軍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육항은 친히 담가 마시던 좋은 술을 사자에게 보내면서 말했다. "양호가 먼저 내게 덕을 베풀었는데 내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호는 기쁜 마음으로 술을 받아 마시면서 말했다. "그 또한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알고 있더란 말이냐?" 이 때부터 양호와 육항은 사람을 보내 .. 2011. 2. 1.
우체부 / 최명희 우체부 최명희(1947 ~ 1998) 그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낯설지 않다. 플라타너스가 한들거리는 신작로, 산모퉁이를 도는 오솔길, 고층 건물이 어지럽고 자동차 소음이 날카로운 대도시 도로, 내게 편지라고는 올 리 없는 이역 먼 거리에서도 그는 반갑다. 우체부를 만나면 그가 특이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내줄 것만 같은 기대로 마음이 차오르곤 한다. 그의 음성은 항상 즐거운 긴장을 준다. 내게는 편지 보낼 곳도, 편지 올 곳도 별로 없으면서, 그의 음성이 먼 곳에서부터 들리면 공연히 가슴을 조인다. 더욱이 볕발이 투명한 가을 오후에 울타리를 넘어오는 그의 소리는 유난히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 가까워지던 목소리가 나를 부르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는 그만 가슴이 텅 비어 버리고, 뛰쳐나가 그의 .. 2010. 12. 2.
자취 / 이시영 자취 이시영 (1949 ~ ) 간밤 누가 내 어깨를 고쳐 누이셨나 신이었는가 바람이었는가 아니면 창문 열고 먼 길 오신 나의 어머님이시었나 뜨락에 굵은 빗소리 해마다 어머님 기일이 다가 오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단 한 번 갔었던 어머니의 친정, 나의 외갓집은 경남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로 지금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교는 가락국민학교인데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가는 고속도로변에서 만날 수 있다. 외삼촌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이전에는 민청 경남 도맹 위원장이었다고 했다. 그는 전쟁 통에도 살아남았지만 또 한 명의 외삼촌은 6.25 전쟁 와중에서 우익에게 살해당했다. 십대 후반의 소녀는 오빠의 주검을 찾아 무수한 시체 더미 속을 헤맸다고 했다. 좌익간부 청년의 여동생인 어머니는 평생.. 2010. 10. 30.
정님이 / 이시영 정님이 이시영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 2009.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