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몽해항로3

몽해 항로 - 당신의 그늘 / 장석주 <인공위성에서 찍은 흑해 사진> 몽해 항로 ―당신의 그늘 장석주(1954 ~ ) 구월 들어 흙비가 내리쳤다. 대가리와 깃털만 남은 멧비둘기는 포식자가 지나간 흔적이다. 공중에 뜬 새들을 세고 또 셌다. 자꾸 새들을 세는 동안 구월이 갔다. 식초에 절인 정어리가 먹고 싶었다. 며칠 입을 닫.. 2012. 11. 12.
몽해 항로 6 - 탁란 / 장석주 몽해 항로 6 - 탁란 장석주(1954~ )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간 어머니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 2012. 3. 12.
몽해항로 - 악공 / 장석주 몽해항로 장석주 (1955 ~ ) ― 악공(樂工)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가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2011.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