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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몽해항로 - 악공 / 장석주

by 언덕에서 2011. 3. 31.

 

 

 

몽해항로   

 

                                 장석주 (1955 ~ )

 

― 악공(樂工)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가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빨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변경(邊境)은 부푸네.

 

 

 

 

 

 

 

 


장석주 시인은 글의 제목을 '몽해항로'로 지었군요. 일단 생소한 용어입니다. ‘몽해항로’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사전을 찾아보니 '죽음을 향해 가는 험난한 길'이라고 정의하네요. 우리는 자신의 삶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고 있군요. 영원한 삶이란 원래부터 없는 거지요. 모 일간지 조간에 실린 이 시를 보면서 새삼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봅니다.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기 보다는, 기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탐색함으로써 확장된 삶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네요. 아아, 상념과 사색의 깊이란 이다지도 깊은 거군요. 이 시인이 얼마나 동양학을 깊이 공부했는지 글을 읽을수록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이진명 시인의 아래 해설이 더 멋들어지군요.

 

 악공은 노래한다. 바둑의 일국이 끝나듯 이 한 생도 덧없이 끝나리라는 걸. 악공은 유장하게 소멸의 노래 ‘몽해항로’를 탄주한다. 삶이라는 바다로 나온 빨간 갓난이, 꿈이라는 항로를 따라 소년을 넘고 청춘을 넘어 곧 서리와 얼음이 올 장년에 도착했노라고. 갈비뼈 아래 숨은 소년 꺼내어 중국술 나누는 추분(秋分)의 밤, 무엇보다 두부 두 모가 있어 술 빠르게 주니 이것이 이 밤의 기쁨. 몽해항로에 설계된 중국술과 두부 두 모의 기쁨 맛보려면 추분 지점까지는 풍랑을 헤치며 나아와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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