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古典을 읽다

유대인 법전 『탈무드(Talmud)』

by 언덕에서 2008. 1. 31.

 

유대인 법전 탈무드(Talmud)  

 

 

 

 

 

 ‘탈무드’란 히브리어로 '연구', '배움'이라는 뜻이다. 유대교에서 <토세프타>를 포함한 구전 율법 모음과 <미슈나>에 대한 학문적 해설과 주석이다.

 <미슈나>는 유대 구전 율법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법전으로서, 3세기초 유다 하 나시가 완성했다. 유대교 학자들(아모라임)의 두 학파인 팔레스타인 학파와 바빌로니아 학파는 각각 독자적인 <탈무드>를 만들어냈다. 두 학파가 동일한 <미슈나>를 사용했고 서로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나, 결국 율법·전승·주석으로 이루어진 별개의 모음집을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모라임은 약 2세기 동안 작업하여 400년경(바빌로니아 아모라임보다 약 1세기가량 앞섬) 완성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탈무드 바블리>라고도 함)는 늦게 완성된 만큼 <팔레스타인 탈무드>(<탈무드 예루샬미>라고도 함)보다 방대하며, 그런 이유로 더 높이 평가받는다. 두 <탈무드> 모두 <미슈나>의 모든 부분을 다룬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들은 아예 주석되지 않았고 어떤 부분들은 그 주석들이 상실된 것 같다. 초기 사본들과 인쇄본들에서는 <미슈나>에 대한 주석을 <탈무드>라고 했으나, 1578∼81년에 나온 바젤판의 경우에는 교회 검열국이 <탈무드>라는 이름을 <게마라>(아람어로 '완성'이라는 뜻)로 바꾸었다. 이렇게 바뀐 이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탈무드>라는 이름은 <미슈나>와 <게마라>를 합친 전체를 가리키는 데만 쓰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탈무드> 학자들이 다시 옛날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탈무드>는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법전이다. <탈무드>의 자료는 독특한 논법으로 구성되었고, 본문도 이러한 논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노력들이 기록되어 있다. 랍비들의 종교적 신념은 <탈무드>의 판결ㆍ사상ㆍ태도에 잘 나타나 있는데, <탈무드>는 의식법 및 사회법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탈무드>가 완성된 뒤 그 내용을 법전으로 만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알려진 최초의 시도는 8세기에 예후다이 가온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결정된 율법>과 9세기에 시메온 키야라가 지은 <위대한 율법>이다. 이 두 책은 <탈무드>의 논법을 없앴지만, 그 순서와 용어는 그대로 보존했다. 이후에 법전편찬은 1가지 주제나 분야에 집중하여 연구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12세기에 마이모니데스가 쓴 <재검토된 토라>와 14세기에 야코프 벤 아셰르가 쓴 <줄들 또는 부분들의 책>, 16세기 요제프 카로가 쓴 <준비된 식탁>이 있다. 세파르디 전승을 중심으로 씌어진 <준비된 식탁>에 16세기 아슈케나지 소속의 법전 편찬자 모세스 이세를레스가 주석을 붙였는데, 그 형식은 모든 유대 법전의 표준이 되었다.

 

 

 

 

 

 그밖에도 <탈무드>에 대한 해석 문헌이 아주 많다. 11세기에 유럽에서는 라시(랍비 슐로모 이츠하키)가 지은 중요한 주석서가 나왔다. 그의 손자들인 이사크, 사무엘, 야코프와 같은 랍비들은 <미슈나>를 해석했듯이 <탈무드>도 해석했으며, 그로써 '토사포트'라는 해석 방법을 만들었다. 이것이 유럽 전역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람반(모세스 벤 나흐만)과 란(니심 벤 레우벤 게론디)과 같은 세파르디 소속의 저자들이 쓴 주석에 영향을 주었다.

 <탈무드> 문헌의 또다른 형식은 7세기에 학자들이 법률과 종교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레스폰사)을 쓰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레스폰사 문학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왔으며, 중세기의 주요저자들로는 마이모니데스ㆍ람반ㆍ란 등을 들 수 있다. 고대 학교들은 구전으로 학문을 전수했기 때문에 <탈무드>가 언제 처음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1523∼24년 베네치아에서 처음 인쇄되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1482년경 스페인에서 인쇄되었다.

 1886년에 빌뉴스에서 처음 인쇄된 표준 번역본은 각 페이지마다 <미슈나>와 그에 관련된 <탈무드>, 주석, 관주를 실었다. <탈무드>는 세계 전역에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중요한 경전이 되어왔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 보수파 유대인들은 점점 더 <탈무드> 연구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반면 개혁파 유대인들은 <탈무드>식 논법과 '레스폰사' 해석 형식을 받아들였다. 현대 <탈무드> 연구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

 

 

 

 

 

 일명 랍비문학. BC 1세기부터 서기 7세기에 활약한 유대교의 랍비(율법학자)들이 남긴 문헌의 총칭. 랍비문학은 미슈나ㆍ토세프타ㆍ탈무드ㆍ미드라시 등의 다양한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랍비문학의 각 책들은 모두 여러 세대에 걸쳐 랍비들이 수집하고 편집한 자료들, 즉 할라카(율법), 하가다(전설), 미드라시(성서 강해), 타르굼(성서 번역), 기도 등으로 되어 있다. 랍비문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모든 자료들을 최종적으로 편집한 장본인들이 바로 현자라고 불린 랍비들이었으므로, 다른 용어로 현자들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또 탈무드라는 용어가 넓은 의미에서 랍비문학에 속하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탈무드 문학으로 호칭될 때도 있다.

 랍비문학은 유대인의 정신적 보고(寶庫)로서, 헤브라이어나 아람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형성은 원래 팔레스티나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3세기부터는 바빌론에서도 발전되었다. 유대 역사에서 ‘미슈나와 탈무드 시기’로 불려지고 있는 5~6세기는 랍비 자료의 문학적 형성이 실제적으로 꽃핀 시기였다. 오늘날의 미슈나ㆍ토세프타ㆍ탈무드ㆍ미드라시의 문학적 형태가 바로 이 시기에 결정되었다. 그러나 랍비문학의 내용에 있어서 그 태동은 이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랍비문학의 자료들은, 바빌론으로 잡혀갔던 유대인의 포로귀환(BC 538)과 제2성전 건축(BC 516) 시기로부터 예루살렘이 멸망(70)에 이르기까지에 이르는, 유대인의 제2공화국 시기의 여러 상황 속에서 구두로 전승되어온 유대인의 사상ㆍ관습ㆍ기록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랍비문학을 수집, 편집하고, 랍비의 사상을 그 시대에 알맞게 가르치고 전파한 것은 랍비학교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최초의 랍비학교는 유대인의 자치정부가 멸망한 시기에 세워졌다. 비록 로마 당국의 비호를 받았다 하더라도 70명의 장로로 구성된 랍비학교가 얌니아에 세워져 유대인의 정신적 삶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탄나임 문학의 편찬과 팔레스티나 탈무드의 편찬,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편찬 등을 이루어내며, 랍비학교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신적 유산을 보존해왔던 것이다. 640년경 아랍이 팔레스티나와 바빌로니아를 함께 통치하면서 유대인의 족장제도가 부활되고, 오늘날의 바그다드인 수라와 품베디타의 랍비대학들은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후 칼리프 제국이 쇠퇴하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집트ㆍ북아프리카ㆍ스페인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망명 족장의 영향력도 점차 쇠퇴하고 랍비학교도 차차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들의 랍비문학이 태동된 시대에 종말을 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