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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抄)

by 언덕에서 2007. 4. 3.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抄)

 

 

 

 

신채호(申采浩)가 쓴 6편의 조선사에 관한 논문을 엮은 책이다.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는데, 홍명희(洪命熹)의 서(序)와 정인보(鄭寅普)의 서(署)가 있다. 이 책에 실린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 제목은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 등이다.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은 한자의 음(音)과 뜻을 빌려서 만든 이두문의 고사상(古史上)의 명사표기를 신채호가 제대로 해석하기 위하여 시도한 글이다.

  그는 이두의 표기에 일정법칙이 없다는 것, 지명의 중국식 표기화에 옛 이름을 번역ㆍ사용하지 않은 것, 역사책에 오자ㆍ중첩자ㆍ탈자 등이 많은 것,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 또는 변개된 글이 많다는 것 등을 들어 이두문은 명사해석이 곤란하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화고증>은 <삼국사기> 속에 동서(東西)의 두 글자가 뒤바뀐 실제와 그 원인 등을 밝힌 글이다. <삼국지동이열전교정>과 <평양패수고>는 그의 고증적인 자세를 잘 보여 주는 논문들이다. 그는 이미 <후한서>가 <삼국지>의 초록임을 이해하는 등 <삼국지>의 중요성을 알았으나 <삼국지>가 가지는 오류도 또한 이 논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조선사연구초>에서 가장 야심적이면서도 그 학술적 영향이 컸던 논문은 <전후삼한고>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다. <전후삼한고>는 단군이 세운 조선이 뒷날 삼조선, 곧 삼한으로 분립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주지역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이들을 전삼한이라 일컬었고, 이들 전삼한이 이동하여 한반도 남쪽의 후삼한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보통 삼한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을, 앞에서의 다른 논문들이 고대사를 다룬 것임에 반하여 이것은 고려 중기의 이른바 ‘묘청(妙淸)의 난’을 다룬 것이다.

  신채호에 의하면, 우리 민족사는 상고시대에는 중국민족에 필적하는 강건하고 큰 힘과 영토․문화․종교사상을 가졌었는데 후대로 오면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 근세에 이르러 종교며 학술․정치․풍속 등이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노예성을 산출하게 한 사건이 고려 인종 13년의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金富軾)의 관군에게 패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신채호에 의하면, 이 전쟁에서 전자가 패하고 후자가 승리함으로써 그 뒤 우리나라의 종교ㆍ학술ㆍ정치ㆍ풍속 등이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ㆍ보수주의로 곧바로 전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