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 장편소설 『루진(Rudin)』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최초의 장편소설로 1856년 발표되었다. 주인공 루진의 이름을 그대로 작품명으로 한 이 소설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수한 지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보람을 발견하지 못하는 잉여인간(剩餘人間)의 모습을 커다란 사회적 현상으로 다루어, 구체적으로 그 원인이나 공과(功過)를 남김없이 그려낸 걸작이다.
주인공 루진은 철학적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하며, 헤겔을 신봉하는 불같은 정의감의 소유자이지만, 의지력의 결핍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는 무능력자이다. 이 소설은 1840년대부터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무기력한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전형을 그린 작품이다. ‘잉여 인간’의 비참한 운명이, 투르게네프의 장기인 미묘한 심리묘사에 힘입어 훌륭하게 형상화(形象化)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지주이자 정부 고관의 미망인인 다리아 미하이로브나는 여름마다 딸 나딸리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영지(領地)로 돌아가, 마음에 드는 손님들, 특히 독신 남성들을 초대해서 시간을 보낸다. 이웃에 사는 여자 주인 알렉산드라와 그 남동생인 퇴역 육군 중위 세르게이, 신흥 지주이며 여자를 싫어하는 독설가 피가소프 등이 그녀의 단골손님이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유명한 귀족의 소개로 나이 서른 대여섯쯤 된, 키가 크고 약간 새우등을 한 까무잡잡한 루진이 찾아왔다. 박학다식하고 이상주의적이며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는 곧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다리아의 권유로 그곳에서 장기간 머물게 되었다.
17세 처녀인 청순한 나딸리야는 루진에게 매혹되어 그들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루진의 동창이며 고지식한 지주 레디네프에게서, 루진이 실천력이 없는 게으름뱅이라는 말을 들은 다리아는 딸을 책망했다. 도망쳐서라도 그들의 사랑을 관철하자고 조르는 나딸리야에게 루진은 운명에의 복종을 설득하고,
“나는 유익한 업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라는 편지를 남겨 두고 길을 떠난다.
몇 년 후, 레디네프는 여행지의 여관에서 만난, 인생의 패잔병인 루진을 격려한다. 1848년 파리혁명의 마지막 날, 바리케이드에서 붉은 기를 흔들면서 총에 맞아 죽은 백발의 노인이 바로 루진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귀족 부인 다리야 미하일로브나는 매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초대해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등이 구부정하고 허름한 모습의 루진이 찾아온다. 겉모습과 달리 청산유수 같은 그의 말솜씨는 곧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곳에 머물게 된 루진은 다리야 미하일로브나의 딸 나딸리야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도피해서라도 사랑을 지키자는 나딸리야의 앞에서 루진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한편 루진의 대학 동기 레쥐뇨프는 루진이 남들의 생각과 달리 언행이 불일치하며 실천력이 없는 한낱 광대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루진』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현실에서 발휘하지 못하는 한 지식인의 삶을 그린 소설로,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과 혁명적 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잉여 인간' 논쟁과 함께 주목받았다. 그 시대의 비평가들은 루진과 같은 인간상을 보고 책임 있는 행동이 요구되면 아주 무기력한 존재로 탈바꿈하는 잉여 인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뇌와 짜리즘으로부터의 일탈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투쟁의 밑바탕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작품은 그 당시 벌어졌던 '잉여 인간' 논쟁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답변이자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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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루진』은 계몽주의와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1840년대, 지식인은 "잉여 인간"으로 취급되었고, 그들은 자기 능력을 펼치지 못했다. 당시 이 작품이 발간된 후, 비평가들은 잉여 인간인 '루진'과 같은 인간상은, 책임감이 요구되면 무기력한 존재로 변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뇌와 일탈은 새 시대의 투쟁 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을 통해 '잉여 인간'에 대한 제 생각을 녹여냈다. 지식인들의 비참한 운명을 구체적인 심리묘사와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냈다. 루진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따스한 시선과 함께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객관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루진은 이상주의자이며, 박학다식한 몰락귀족적(沒落貴族的) ‘무위도식자(無爲徒食者)’의 전형이다. 줄거리는 부유한 여지주의 딸 나딸리야는 루진이 주장하는 숭고한 이상에 눈을 떠, 그와 함께 새로 뜻있는 생활을 하려 하나 그녀 어머니의 반대로 루진은 낭패해하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갖가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848년 혁명 당시 파리에서 이름 없는 희생자로 사라진다. 이상(理想)을 말하고 현실의 변혁을 바라면서도 행동에서는 무력한 것이 1840년대 이상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중인물 한 사람을 통해 그의 말은 실제적인 행동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고 했다. 나딸리야는 루진에 환멸을 느끼나 그의 사상이 옳았음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웅변으로 사회를 깨우친 것이 루진과 같은 이들의 역사적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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