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장편소설 『지하 생활자의 수기(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Dostoevski Fedor Mikhailovich.1821∼1881)의 장편소설로 1864년 발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역자에 따라 <지하로부터의 수기> · <지하에서 쓴 수기> · <지하에서 쓴 회상록> 등으로 번역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된 소설로,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그동안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소설 형식을 선보여, 기존의 소설 문법뿐 아니라 세계 인식의 틀마저 배반하는 실험을 감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1부 <지하>와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 1부에서는 구린내 나고 추악한 지하에서 이십 년 동안이나 독기를 품은 채 살아온 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가 그린 '지하 생활자'는 실제로 몸이 허약한 약골이다. 젊은 시절 하급 관리로 사회생활을 했지만 친분도 거의 없이, 모든 이들을 혐오해왔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작은 행동에도 심한 모욕을 느끼며 온갖 방법으로 복수할 궁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 2부에서는 그가 이십 대에 겪었던 사건 두 가지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도 이념도 모두 경멸하며, 나아가 자기 자신을 가장 경멸하는 이다. 주인공 '지하 인간'은 기존의 소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준다. '지하생활자'는 자신이 한없이 모욕당했다고 느낀 파티가 끝나고 나서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불쌍한 창녀를 괴롭힌다. 그는 파티에서 즈베르코프 일당에게 당했던, 혹은 당했다고 생각하는 학대를 그대로 모방하여 이 창녀에게 쏟아붓는다. 그가 고백하는 위악적인 가치관 역시 기존의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지하 인간'은 이후 톨스토이, 체호프를 비롯하여 21세기 소설가 랠프 엘리슨, 영화 <택시 운전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1부 <지하>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는 마흔 살가량의 남자로, 이십 년쯤 전에 하급 관리로 일했으나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후 줄곧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학창 시절의 친구도 없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친분을 쌓지 못해 인간관계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그는 이런 상황에 거의 아무런 불만이 없고 오히려 모든 이들을 혐오할 뿐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작은 행동에도 심한 모욕을 느끼며 온갖 방법으로 복수할 궁리를 한다. 그러나 그뿐,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십 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지하에 틀어박혀 있었다.
●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
주인공이 이십 대에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준다.
◎ 일화 1 : 한 장교와 당구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데, 장교는 길을 막고 있는 그를 물건처럼 집어 들어 옆에다 내려놓은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간다. 주인공은 이 일로 크나큰 치욕을 느끼고 장교에게 복수할 궁리를 시작한다. 그를 비방하는 소설도 쓰고 결투를 신청하는 편지도 쓰지만, 둘 다 거기서 그친다. '지하 생활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간 장교에게 그토록 열렬하게 편지를 쓰는 것도 장교의 무관심이 욕망된 대상의 가치를 더욱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 일화 2 : 초대받지 않은 동창생들 모임에 주인공이 참석했던 이야기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교류가 없었던 동창생들이 환송회를 연다고 하자 돈까지 빌려 가며 부득부득 그 자리에 낀다. 그러나 막상 모임에서는 같이 어울리지도 못하고 엉뚱한 행동만 할 뿐이다. 주인공은 그들을 쫓아 유곽에까지 따라가는데, 거기서 리자라는 매춘부를 만난다. 무슨 말을 해도 뚱한 반응을 보이는 리자의 태도에 약이 올라, 그녀의 미래에 대해 온갖 잔인한 말을 퍼부어 그녀를 울리고 만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이나 리자가 찾아올까 봐 노심초사하다가 하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바로 그 순간에 리자가 그를 방문한다. 그녀가 그런 모습을 목격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그녀를 증오하게 된다.
이처럼 작중 주인공 자신은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도 이념도 모두 경멸하고, 나아가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신을 가장 경멸한다. 언제나 조롱과 경멸을 자초해 놓고는 그들에 대한 증오로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결국에는 자기를 괴롭히고 저주하는 지경까지 자신을 몰고 간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전 창작 활동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두 시기로 구분하는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으로서, 과거 작품에 대해서는 거부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으며, 이후 대작 소설들에 대해서는 철학적 서문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비록 양적으로는 그리 많지 않지만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작가의 5대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 속에서 나타나게 될 주요한 주제들 및 정치적·철학적·윤리적·종교적인 제반 문제들과 그 해결 방안으로서의 구원의 문제들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860년대 젊은 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반박이었다. 체르니솁스키는 1860년대 당시 젊은 지성인들 사이에 열렬한 우상적 숭배를 받은 허무주의적 유물론의 기수였다. 그는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하며, 따라서 환경이 좋아지고 개선되면 인간의 모든 악행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실제적 본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그 이론의 순진한 허구성과 인간을 개미 떼나 가축 떼로 몰아가려고 하는, 즉 인간성 박탈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적 이상 국가의 두려움을 분명하게 자각했다.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치 하나의 삶의 지침이요, 교과서요, 성서처럼 받들고 있던 당시의 많은 젊은이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성 상실에 대한 우려를 강력히 나타내며,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알려야 할 의무를 느낀 결과로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등장하는 주요 단어들, 텍스트, 내용, 표현, 주요 사건 등을 빌려 지하 생활자의 말속에서 왜곡하고 패러디하고 희화한다. 체르니솁스키가 꿈꾸었던 것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추악하여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추한 것들로 가득 찬 지하실을 가지고 있고, 논리나 이성, 자연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자유로움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며 특징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반박이라는 작품의 직접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지하 생활자가 구체화하고 있는 고독, 자유, 선택, 고통, 노예화, 정체성, 구원으로서의 사랑의 문제 등의 모든 테마는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늘 현대적이고, 늘 보편적으로 남아 있는 인간의 주제다. 이렇듯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시공을 초월한 우주적이고 무시간적인 주제성은 작품 자체의 예술성을 영원히 가능케 해 줄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몇 세기가 지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릴 수 있는 영원한 명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가장 도스토옙스키적인 예술 작품이다. 수기의 저자인 소위 “역설가”는 단순히 관념적, 철학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그 시대와 사회의 모든 정황을 몸으로 앓아 내고 난 후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로 설정한 인물이다. 그리고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통해 이루어진 문학적·철학적·윤리적·세계관적 발견들은 이후 도스토옙스키가 창작하게 될 모든 대작들의 뼈대를 이루는 내적 근거가 되었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유례가 없는 긴 독백 형식으로 쓰인 놀랄 만한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에서 발견되는 예술적 모티프의 밑바탕을 내포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 어디에도 적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삶에 대한 은폐된 불안과 은밀한 증오에 시달리며 철저히 고립된 곳에 도피처를 마련한다. 뿌리가 박탈된 이 ‘지하실의 남자’는 시대를 적대함으로써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적의에 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이 초라하고 고독한 공간에서 바깥세상의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비웃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한다.
앙드레 지드는 이 작품을 가리켜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평했다.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지극히 반어적이고 신랄한 어투로 쓰인 이 작품이 발표되기 전까지의 그가 단지 러시아 문단의 일류 작가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이 발표된 후의 그는 세계 문학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세계적 천재의 경지에 오른다. 인간 내부의 상호 모순하는 요소 사이의 대립과 투쟁을 기조로 하여 커다란 사회, 윤리, 철학의 문제로 독자적인 사색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사상 소설의 영역을 개척한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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