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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프리다 칼로와 'La Llorona'

by 언덕에서 2015. 6. 4.

 

 

프리다 칼로와 'La Llorona' 

 

 

 

오늘은 어제에 이어 프리다 칼로와 관련된 라틴계 팝가요 'La Llorona‘에 대해 설명해볼까 한다. 

 최초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것으로 알려진 이는 멕시코의 여가수 차벨라 바르가스1(1919 ~ 2012)인데, 그녀는 음악계 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대중문화 전체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화가 프리다 칼로(1907 ~ 1957)와 연인(동성애)사이였다는 풍문은 이미 정설이 되고 말았다.

 

 

 

 

 

  'La Llorona(요로나)'는 '울고 있는 여인'이라는 뜻으로 멕시코의 오래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Maria라고 불리는 여인은 농장을 운영하고 있던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하고는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시간이 지나 남편이 그녀에게 관심을 잃고 아이들에게만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던 어느 날 Maria는 남편이 다른 여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남편은 마차를 세우고는 그녀를 무시하고 아이들에게만 이야기를 하자 이에 그녀는 너무나 화가 나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는 아이들을 들고는 근처 강으로 가서는 아이들을 강으로 던져버린다곧바로 그녀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저지른 일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그녀는 강을 쫓아 내려가면서 아이들을 구해내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강에 결국 쓸려 내려가고 말았다다음날 그녀 역시 강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이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그녀가 '아이들은 어디에 있지?'라고 울면서 강가를 돌아다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름답거나 애틋하기만 한 것이 아닌 걸로 보아 아마도 실화일 것 같은 이야기다. 가사를 보도록 하자. 

 

 

La Llorona (울고 있는 여인)

 

(스페인어 가사)

 

Todos me dicen la negra Llorona

Negra pero, carinosa

Yo soy como el chile verde Llorona

Picante pero sabrosa

 

Dicen que no tengo duelo Llorona

Porque no me ven llorar

Hay muertos que no hacen ruido Llorona

Y es mas grande en su penar

 

Ay de mi Llorona

Llorona de ayer y hoy

Ayer maravilla fui Llorona

Y ahora ni sombra soy

 

Ay de mi Llorona

Llorona de azul celeste...

 

(영어 가사)

 

Everyone calls me the dark one, Llorona

Dark but loving

I am like the green chile, Llorona

Spicy, but tasty

 

모두들 나를 어둠 속의 사람이라 하지, 요로나,

어둡지만 사랑스럽다 하지,

나는 녹색의 칠리와 닮았네, 요로나,

아주 맵지만 그 맛은 좋지,

 

They say that I do not feel pain, Llorona

Because they don't see me cry

There are dead people who do not make a sound, Llorona

And it is greater than their worry

 

사람들은 내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 요로나,

그건 그들이 내가 우는 걸 보지 못해서 그래,

이 세상에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죽은 이들이 많지, 요로나,

그들의 고통이 너무 커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거지,

 

Ah me, Llorona

Llorona of yesterday and today

Yesterday I was a marvel Llorona

Today, I am less than a shadow of that

 

아, 나는 요로나,

어제의 나, 그리고 오늘의 나,

어제 나는 참으로 멋진 요로나 였지,

오늘 나는 옛 것의 그림자보다 못하지,

 

Ah me, Llorona

Llorona of the blue sky.

 

아, 나는 요로나,

푸른 하늘의 요로나.

 

 

 지금 들리는 이 노래는 존 바에즈2의 육성이다. 이 노래는 차벨라 바르가스 이후 존 바에즈 외에도 많은 유명 가수들이 불렀으며 영화 'FRIDA'에도 등장한다. 아마 남미의 대표적인 여가수는 거의 다 한번씩 불렀을 것 같다 '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여왕'이 아니라도 그의 목소리, 그의 노래, 말들이 나를 여유 있고 건전하게 만들어 준다.

‘요로나’는 2002년에 개봉한 영화 <프리다>에도 삽입되어 있는데, 샤벨라 바르가스가 직접 출연하여 노래한다.  20세기 초중반, 멕시코의 여성 화가인 ‘프리다 칼로’를 극화한 이 영화는 2003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바람기 때문에 상심한 프리다 칼로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샤벨라 바르가스가 프리다 칼로를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요로나’다.

 속설에 의하면 샤벨라 바르가스와 프리다 칼로는 연인관계(동성애)였다고 한다. 샤벨라는 프리다 칼로가 죽기 전 5년간 그녀의 침대 곁을 지켜주었다고 전해진다.

 프리다는 생전에 샤벨라 바르가스의 탁한 음색을 듣고, “목에 악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샤벨라 바르가스 역시 프리다 칼로와의 사랑에 대해, “첫 눈에 반한 황홀함은 지상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 행성에서 찾아온 빛이었다. 희생, 순수, 자유, 슬픔, 열린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하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비디오 마지막 부분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람은 프리다 칼로의 연인이었던 ‘트로츠키’다. 다른 가수들이 부른 ‘요로나’와 비교해 보면, 샤벨라 바르가스가 부른 ‘요로나’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존 바에즈의 노래 역시 압권이다.

 

 

 

  1. 차벨라 바르가스(1919 ~ 2012)코스타리카 태생인 바르가스는 부모가 이혼한 후 14세에 멕시코로 건너와 거리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가톨릭 국가인 멕시코에서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깼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30대부터 본격적인 대중 가수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평소 권총을 차고 다니고 남성복과 시가를 즐겼으며, 심지어 무대 위에서 음주를 하는 등의 행동으로 유명세를 탔다.호소력 강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특징인 그는 란체라 음악으로 인기를 얻었다. 란체라는 사랑과 실연을 주로 노래하는 장르로 빠른 왈츠풍이지만 절절함의 정서가 담긴 음악이다. 란체라는 주로 남자들이 불렀던 장르지만 바르가스는 특유의 깊고 낮은 목소리로 란체라를 멋지게 소화해냈다. 그는 생애 동안 무려 80장의 음반을 냈다.또한 그는 화가적인 재능도 지녀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친구가 됐고, 그의 부인인 화가 프리다 칼로의 동성연인이기도 했다. 그는 1954년 칼로가 사망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등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칼로의 생을 다룬 영화 ‘프리다’에서 ‘우는 여자’(La Llorona)를 노래하며 재기했다. 그는 지난 2007년엔 라틴음반아카데미의 공로상을 받았다 [본문으로]
  2. 존 산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 1941년 1월 9일 ~ )는 미국의 가수이며 인권운동가이며 반전평화운동가이다. 존 바에즈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알베르트 비니치오 바에즈(Albert Vinicio Baez)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브리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그녀의 아버지는 핵무기 제조에 반대하는 물리학자였으며 어머니는 희곡작가였다. 나중에 바에즈가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반전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하게 된 데에는 반핵물리학자였던 멕시코계 아버지를 둔 가정적 환경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바에즈는 1961년 뉴욕에서 밥 딜런을 만나 함께 전국순회공연을 하며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앞장서고 월남 반전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국내외에서 펼친 음악활동만큼 반전운동도 맹렬했던 그녀는 직접 반전시위에 가담하여 체포당하기도 하였다. 1968년 3월 26일 반전운동가인 데이비드 해리스(David Harris)와 결혼한 바에즈는 해리스가 비폭력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로 투옥되자 우드스탁 축제(The Woodstock Festival)에 참여하는 등 반전운동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면서 바에즈의 활동도 변화되어 전통 포크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스타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녀의 최대 명곡인 〈Diamond & Rust〉는 새로운 음반사 A&M를 통하여 1975년 4월에 발매되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학마저 중퇴했지만 실력으로 평생 큰 업적을 이루었다. 바에즈는 8장의 골드앨범과 1장의 골드싱글을 기록하였다. 그래미상 후보에 6번 선정되었으며 200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하였다. 인권과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2개 주로부터 존 바에즈의 날(Joan Baez Day)을 지정받는 명예를 얻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