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지난 주말은 날씨가 화창해서 나들이하기에 딱 좋았다.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했고 행락 나온 젊은 연인, 부부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연중 가장 좋은 시절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은 이 즈음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런 시기에 잘 어울리는 시(詩) 한 편 소개할까 한다. 만전춘(滿殿春). 지금으로부터 1000년 훨씬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가요다. 그러나 현대시 못지않게 애절한 정조와 능숙한 시적 기법을 자랑하는 명작이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만들어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만들어
님과 내가 얼어 죽을 망정
정 나눈 오늘 밤 더디 새시라 더디 새시라
뒤척 뒤척 외로운 침상에
어찌 잠이 오리오
서창을 열어보니
복사꽃 피었도다
복사꽃은 시름 없이 봄바람 비웃네 봄바람 비웃네
넋이라도 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 그리더니
넋이라도 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 그리더니
우기시던 이 누구입니까 누구입니까
오리야 오리야
어린 비오리야
여울일랑 어디 두고
못(沼)에 자러 오느냐
못이 얼면 여울도 좋거니 여울도 좋거니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약 든 가슴을 맞추옵시다 맞추옵시다
아! 님이여 평생토록 여읠 줄 모르고 지냅시다
만전춘은 작자와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고려가요(高麗歌謠)로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라고도 부른다. 이는 조선시대에 윤회(尹淮)가 지은 <만전춘>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전 5연으로 된 이 노래는 남녀간의 사랑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읊고 있어서 고려가요 특유의 주제와 소재를 가장 잘 구비하고 있다. 또한 여요가 가지고 있는 주제와 소재면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장 잘 구비하고 있는 작품이다.
폭로적ㆍ퇴폐적인 표현 기교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긴 하나, 그 속에 담겨있는 비유법과 심상의 전개는 현대적인 감각을 다분히 풍기고 있어 현대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문학자들은 제2연과 제5연이 시조형에 대단히 접근하여 가고 있는 것을 의미있는 부분으로 지적한다. 조선 성종 때는 내용이 음란하다 하여 유학자들 사이에서 말썽을 빚기도 하였으나, 비유법과 심상의 전개가 흡사 현대의 시작법을 보는 듯하다.
고려시대 향악곡의 하나인 <만전춘>의 악보는 <세종실록> 권146과 <대악후보> 권5에 전하며, 그 가사는 <세종실록>과 <악장가사>에 전하나 이 두 문헌에 전하는 가사가 각기 다르다. <악장가사>에서 이 원사를 <만전춘별사>라 한 것은 원래의 <만전춘>이 남녀상열지사로 지탄받음에 따라, 별사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나와 어러주글 만뎡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나와 어러주글 만뎡
졍(情) 둔 오범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경경(耿耿) 고침샹(孤枕上)애
어느미 오리오
셔창(西窓)을 여러니
도화(桃花)ㅣ 발(發)두다
도화(桃花) 시름업서 쇼츈풍(笑春風)다 쇼츈풍(笑春風)다
넉시라도 님을
녀닛경(景) 너기다니
넉시라도 님을
녀닛경(景) 너기다니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뉘러시니잇가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듸 두고
소해 자라온다
소콧 얼면 여흘도 됴니 여흘도 됴니
남산(南山)애 자리보와
옥산(玉山)을 벼여누어
금슈산(錦繡山) 니블안해
샤향(麝香)각시를 아나누어
약(藥)든 가을 맛초사이다 맛초사이다
아소 님하 원대평생(遠代平生)애 여힐 모새
- 樂章歌詞 -
각 연은 형식상으로 불균형을 보이고 있고 시어도 이질적이며 의미상으로도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이 여러 이질적이고 독립적인 당대의 유행 노래를 궁중의 속악가사로 합성하고 재편성함으로써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용은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노래한 것으로, 노래의 노골적이고 퇴폐적인 표현 때문에 조선시대 사대부에 의해 음탕한 노래로 규정되어 배척되었다. 이는 새로운 만전춘사인 <봉황음>을 짓게 하는 계기를 주기도 하였다고 분석된다.
그 내용을 보면, 제1연에서는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 임과 내가 함께 얼어 죽어도 좋으니 제발 밤만 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2연에서는 임이 오지 않으니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창 밖의 도화에다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표현했다. 제3연에서는 넋이라도 함께 가자고 맹세한 임을 원망하고 있다. 제4연에서는 물오리더러 여울을 두고 왜 소에 자러 오는가 하니, 소가 얼면 여울로 가겠다는 대화가 벌어진다. 이는 남성의 여성편력을 나무라는 듯한 여성화자와 이에 능글맞게 대꾸하는 남성화자 사이의 대화처럼 들린다.
표현 면에서는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언어 표현이 지배적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비유와 상징, 반어와 역설 등을 통하여 남녀 사이의 강렬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노래의 2연과 5연이 시조 양식에 접근하는 형태를 보여준다고 하여 시조 장르의 기원을 찾는 자료로 주목된 바 있다. 또한 이 노래가 민요·속요·시조·한시·경기체가·향가 등 당대의 기존 장르를 다양하게 수용하여 양식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들에 기초하여 <만전춘>이 장르 복합체로서의 양상을 보이는 가요로 규명된 바도 있다.
이 노래는 넓은 의미의 시조 양식이 속요(속악가사)에 개입된 것으로 보아, 쇠퇴기의 속요 작품일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혹은 여러 이질적인 가요가 뒤섞여 얽어졌다는 점에서 초창기의 속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성윤리가 엄격했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개방적이었고, 고려가요 역시 남녀의 정념으로 넘친다. 고려가요하면 ‘남녀상열지사’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이유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고 애잔한지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로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심금을 울린다. 화자는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고 죽는 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마음일 것이다.
정작 고려사 중에는 이것들에 관한 기록이 없는데 뒷날의 악장가사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고려가요라고 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지만 노래의 투가 그렇게 되어있어 다들 고려가요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쓴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고은 시인은 '노는 여인의 애정이지만 고려사회는 훨씬 난숙한 관능으로 분방했다’고 분석했다. 화자를 '노는 여인' 즉 기생으로 국한시킨 것은 너무 속좁은 견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념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회는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그는 조선이라는 봉건사회의 틀에서 이 시를 해석한 것은 아닌지.
‘얼음위에 댓잎깐 자리에서 얼어죽을망정’이라는 남녀의 애정이 매우 처연하고 솔직하다. 본능을 인간심성의 밑에 두는 수작에 일격을 가할 만하다. 마지막 연의 '약든 가슴' 이란 표현은 드라마로 치면 클라이맥스다. 어떤 학자는 약을 향주머니로 풀이하던데 육체로서의 가슴 그것으로 풀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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