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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최초의 세계일주자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항해자 마젤란』

by 언덕에서 2014. 5. 8.

 

 

 

최초의 세계일주자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항해자 마젤란』

 

 

 

 

 

 

 

<위대한 항해자 마젤란>은 500년 전 아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세계일주를 시도했던 사람 마젤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그의 계획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항해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념과 사건들,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를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 · 정치적 상황에서 그런 계획이 전개될 수 있었으며, 결국 그로 인해 이익을 본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해 저자는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포르투갈 하급 귀족이던 마젤란은 신세계 항해에 대한 열정과 야심이 남달랐지만, 왕실의 불신으로 항해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젊음과 건강과 명예를 잃고 나서 에스파냐로 망명한 마젤란은 향료 제도 항해의 꿈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환영하고 지지하는 곳은 없었다. 고국 포르투갈에서 그는 역적이었고, 망명한 에스파냐에서는 첩자 취급을 받았다. 부하들이 반란을 기도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놀라운 것은 궁지에 몰릴수록 마젤란의 투지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그가 이방의 땅에서 절대자로 추앙받던 영광스런 순간,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은 슬픈 아이러니이다.

 

 

 

 

 

 포르투갈 항해가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4.27)은 마젤란해협 발견자ㆍ인류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의 지휘자로 유명하다. 포르투 출생인 그는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일찍부터 왕비 레오노르의 시중을 들며 왕실에서 지냈다. 1505년 인도 부왕(副王) F. 알메이다의 함대로 사촌형제인 F. 세랑과 함께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 7년 동안 생활하면서 몰루카 제도(諸島)와 그 풍부한 향료 거래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15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 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1512년 포르투갈로 귀국한 그는 1516년 국왕 마누엘 1세에게 봉급의 증액과 항해 허가 등을 청원하였으나 국왕의 빈축만을 사게 되자 1517년 옆나라인 카스티야로 옮겨갔다. 1518년 스페인 지역의 카스티야왕 카롤루스 1세에게 몰루카 제도의 탐험을 제안하여 같은 해 3월 22일 교섭이 성립되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선구적인 인도 항해는 포르투갈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새로 발견된 인도 항로로 인해 동방의 부가 포르투갈의 영향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항로를 이용하면서 향료 무역의 상당 부분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오랜 적인 이슬람교도들에게 결정적인 경제적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마누엘 1세는 이런 전망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 우쭐해진 그는 코엘류가 리스본에 도착한 직후, 아직 다 가마가 도착하기 전에 에스파냐의 경쟁자인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왕비에게 승리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p.177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 제도에 갈 계획 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40명으로 세비야를 거쳐 1519년 9월 20일 산루카르데바라메다항(港)을 출발하여 카나리아 제도를 지나 같은 해 12월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3월부터 파타고니아 지방의 산훌리안항에서 겨울을 보내고, 8월 항해를 재개하여 1520년 11월 28일 남아메리카대륙 끝과 티에라델푸에고섬 사이에 있는 통로인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나왔다. 이때에 침몰ㆍ도망한 함대는 각각 1척,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바다로 예상하고 서진(西進)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하다가 1521년 3월 6일 괌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다. 며칠 후인 3월 16일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필리핀 지역인 세부섬의 왕 및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는 부근의 막탄섬의 추장을 징벌하기 위하여 출진, 토벌을 시작하였다가 4월 27일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지점이 몰루카 제도의 경선(經線)을 넘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완수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휘자를 잃은 남은 선단원(船團員)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으로 1521년 11월 몰루카 제도(현재 인도네시아 지역)의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號)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티도레섬을 출항하여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그러나 식료품의 부족과 괴혈병ㆍ악천후에 시달려, 살아 돌아온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에 불과하였다. 필리핀ㆍ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命名)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며, 이항해가 사상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로 기록되었다.

 

 

 

 

 

 

 마젤란(스페인 이름: 페르난도 데 마가랴네스)은 포르투갈 태생으로 스페인 왕에 도움을 요청, 5척의 함대와 226명의 승무원을 대동, 1519년 9월 20일 '산 루가루'항을 출발하였다. 남아메리카 연안 해협을 찾아 남하, 이듬해 10월 21일 성도해협(聖徒海峽)을 통과, 도중에 1척을 잃고 11월 28일 바다로 나서게 되었다.

 마젤란은 다시 동쪽으로 배를 돌려도 되었지만, 마젤란은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태평양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에 태평양 횡단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이후 110일간 1만6천 해리를 항해 중 폭풍우가 없어 '태평양(太平洋 :(평온한 바다.Mar pacific)이라 명명하였다. 식량이 떨어져 소가죽, 톱밥, 쥐를 먹으며 항해 중 1521년 3월 6일 비로소 괌섬을 발견, 4개월 만에 신선한 음식물을 먹게 되었으나 주민들에게 물건, 보트까지 도둑을 맞아 '라도로네스 제도'(도적의 섬)라 명명하였다. 이어 108일간의 항해 끝에 마젤란 함대는 1521년 4월에 필리핀에 도착하였다(이것이 필리핀에 가톨릭이 전파된 유래이다).

 

 

 

 

 

 그는 인도 총독 밑에 있을 때에 와 본 적이 있는 몰루카 제도의 경선을 넘음으로써, 사실상 그의 세계일주는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 군도는 이때 이름 붙여졌다. 이 무렵 그의 배는 3척밖에 남지 않았다. 마젤란 일행은 이를 "신대륙 발견"으로 여겼다. 그러나 마젤란의 "발견"은 원주민들의 입장에선 억울하게 당한 "침략"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수백 년에 걸친 식민지 "수탈"과 "압제"가 시작된 역사의 신호탄이었다. 필리핀에서 마젤란은 열심히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마젤란은 처음 세부 섬에 상륙하여 이 지역 부족의 추장 주아나 일족과 부족 800여 명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러다가 1521년 4월 27일 마지막 섬인 막탄 섬에 갔다가 추장 라푸라푸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지휘자를 잃은 선단원(船團員)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콘셉시온 호)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빅토리아, 트리니다드 호)으로 필리핀 일대를 운항했으며 마침내 1521년 11월 향신료의 섬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였다.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號)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신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생존자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 등 18명이었다. 필리핀·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빅토리아 호 1척만이 세바스티안 델 카노를 장으로 보르네오를 거쳐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 6일 18명이 산 루카루에 도착, 3년 27일간 5만8천 해리의 세계 일주를 끝냈다.

 결국 세계 일주를 완벽히 해낸 것은 17명의 마젤란 부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아메리카 대륙 서쪽에는 지구에서 제일 넓은 태평양이라는 큰 바다가 있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출발한 곳에 돌아오면 날짜가 하루 늦어진다는 사실도 이때 밝혀졌다.  

 

 

 

 


 

☞ 베른하르트 카이 : 오늘 소개한 책의 저자로 1930년에 태어나 슐레지엔, 브란덴부르크, 알자스와 오스트프리란트 등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기술 분석과 프로그래밍 관리자로서 최초의 활자조판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그 후 사진식자 프로젝트에 공동책임자로 참여하는 동시에 전문서적 집필과 리포터, 논설가로서의 활동을 병행했다. 1981년부터 역사적 · 해양학적 주제의 기사를 쓰기 시작했으며 1994년 이후로는 작가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취리히 호수 근처 라헨에 살고 있으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정기적으로 항해사와 관련된 글을 발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