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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무애도인 스님 『춘성(春城)』

by 언덕에서 2013. 4. 30.

 

 

 

무애도인 스님 『춘성(春城)』 

 

요즘 인터넷상에서 돌아다니는 아래의 만화와 같은 춘성 스님에 대한 일화는 재미있기 짝이 없다. 춘성은 도인, 선지식, 큰스님이었지만, 그의 유언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로 인해 춘성에 대한 정리, 소묘 등은 지금껏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미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춘성에 관한 책을 소개할까 한다.

 근. 현대 불교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 작업을 한 저자는 지난 2년간 춘성에 대한 문헌자료 검토, 분석을 수행하면서 춘성과 인연이 있는 스님, 재가자 등을 찾아 춘성에 대한 증언을 채록하여 책으로 담았다. 이 책은 2009년 2월에 출간되었다.

 

 

 春成 스님의 속명은 이창림(李昌林)이다. 1891년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서 태어났다. 1901년 13세 때 백담사에 출가하여 10여 년간 만해 한용운(1879 ~ 1944)을 모시며 수학하였다. 1919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가 되었고, 1929년 만공의 법을 이어받았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다.

 춘성(1891~1977)은 욕쟁이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선승으로 더 유명하다. 경학과 강연으로 이름을 날리자 일제가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냉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스승인 만해가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도맡았고, 감옥에 갇힌 스승이 냉방에서 고초를 겪는다며 아무리 추워도 자신의 방에 불을 때지 못하게 했다.

 만해의 '조선독립의 서'는 춘성이 감옥에 있던 스승의 편지를 범어사 스님에게 전했고, 이것이 상해 임시정부로 배달돼 1919년 11월 4일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이 명문은 만해의 믿을 만한 제자 춘성이 없었다면 빛을 보는 게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 민족운동사에 길이 남을 문장인 『조선독립의 서』를 옥 밖으로 나오게 한 장본인이 춘성임을 알게 된다. 옥중에 수감되어 매서운 지조를 지키던 한용운은 조선독립에 대한 명분, 당위성을 일체의 책을 참고하지 않고, 1919년 7월 10일에 집필하여 일제의 재판관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면서 한용운은 그 글을 휴지에 써서 똘똘 말고, 종이끈으로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자신의 옷의 갈피에 숨겨 춘성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춘성은 항일 불교청년운동을 철저히 수행하면서 한용운을 열렬히 따르던 범어사 청년 승려인 김상호에게 그 문건을 전달하였다. 김상호는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불교계의 비밀루트를 이용하여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 11. 4)에 그 전문이 게재되었다. --- p.42~45

 

 요즘 인터넷상에서 돌아다니는 춘성에 대한 일화는 재미있으라고 약간 거짓말을 보탠 듯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 모두가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웃으면서 읽을 수밖에 없지만 행간에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이자 대선사 만공의 법제자였으며, 용성 스님 밑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春成은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禪지식인이었다. 한국 선종의 맥을 이은 선승이자, 한평생을 탈속한 무애도인으로 살았던 춘성의 진면목은 갖가지 기행과 걸쭉한 육두문자로 행한 호탕한 설법,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욕은 <벽암록>을 뛰어넘는 시대의 공안(公眼)이자 카타르시스 이었다.

 

[춘성스님 1화 : 주소는 엄마 X지, 본적은 아버지 X지]

 

  춘성이 망월사 불사를 할 때에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경찰서에 가서 나눈 대화였다.

“본적이 어디입니까?”

“내 본적은 우리 아버지 신두(腎頭)이지.”

 경찰은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궁하듯이 재차 물었다.

“본적을 말해요, 본적이 어디냐고요?”

“그것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자지라고요?”

 경찰은 기가 차듯이 웃고 말았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남성의 상징을 자신의 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웃을 도리 밖에 없었다. 경찰은 애써 긴장하면서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고향은 어디입니까?”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보지 속이지.” --- p.112

 

[춘성스님 2화 : 내가 중대장이다]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이 넘어서 밤길을 가고 있었다. 방범 순찰을 하던 순경이 춘성에게 물었다.

“누구요?”

 춘성이 어둠 속에서 즉각 답을 하였다.

 “중대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순경은 목소리는 노인 목소리인데, 중대장이라고 하니 의아해서 들고 있던 플래시로 춘성을 비추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지! 맞지?” --- p.397

 

[춘성스님 3화: 생일날 법어 "지 에미 X지에서 응애하고 나온 날이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육영수는 보문사에서 겪은 춘성이 생각이 났는지, 아니면 누가 큰스님인가를 주변에 물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춘성을 청와대에서 열린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청하였다. 그 초청은 자신의 생일에 와서 좋은 법문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춘성이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그 당시 힘 꽤나 쓰는 고관대작, 그리고 고관대작의 부인네들, 얼굴이 번지르한 국회의원 등이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런 저런 식순이 지나서 춘성이 설법을 할 차례가 되었다. 법상에 오른 춘성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여분이 지나자, 사람들의 몸이 비틀어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할 즈음에 춘성은 주장자로 법상을 쿵! 한번 치며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 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다.” --- p.398~399

 

[춘성스님 4화: 혼수에는 X이 제일이고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

 

 춘성은 진관사 대웅전 상량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에, 진관 비구니가 법사로 초청하자 아침나절 일찍이 진관사로 왔다. 서울 변두리의 한적한 절이었지만, 절을 재건하려는 진관을 따르는 신도들이 제법 모여 들어 사람이 매우 많았다. 드디어 초청법사가 법문을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이날 춘성은 여느 때처럼 양복을 걸쳐 입었다. 메꼬 모자를 쓰고, 구두까지 신은 상태이었다. 그러니깐 도저히 그 차림으로는 불교행사장의 법상에 오를 수는 없었다. 춘성은 그 절에 있는 비구니의 장삼 저고리를 빌려 입게 되었다. 진관사에서 가장 키가 큰 비구니의 장삼을 걸쳐 입었지만, 신체가 장대하였던 춘성에게는 종아리에도 못 미쳤다.

 이렇게 춘성은 아주 짧은 미니장삼을 입고서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법상으로 올라갔다. 법상에 오른 춘성은 몇 분간은 묵언으로, 양구하며,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말을 하였다.

“혼수에는 좆이 제일이요,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 p.420

 

[춘성스님 5화 : 어찌 따뜻한 방을 쓰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기념연설을 하고 만세 삼창을 선도하였다. 그래서 그 길로 한용운은 일제에 피체되어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한용운이 옥에 수감되자 춘성은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나왔다. 그는 거처를 서울의 외곽에 있는 절인 망월사로 정하고, 서대문 감옥을 드나들면서 한용운을 정성껏 시봉하였다. 춘성은 그때 망월사에 머무르면서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고 자지도 않고 냉골 방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때 망월사를 들렀던 어떤 스님이 땔감이 절에 가득한 데에도 불구하고 불을 때지 않은 냉방에서 자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춘성에게 그를 물었다.

“아니, 저렇게 땔나무가 많이 있는데 어째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잠을 자는 게요?”

“그야 그렇지만, 제 스승이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 한데 붙잡혀 지금 서대문 감옥의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그 제자인 제가 어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춘성은 이처럼 한용운이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는 줄곧 냉방에서 자며 수행을 하였다. --- p.40~41

 

[춘성스님 6화 : 내 좆을 믿어라]

 

 춘성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탔는데, 그 당시에도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을 써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스님이 타신 칸에 우르르 몰려 타더니,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를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 갑니다."

 그러자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춘성이 기골이 장대하기 때문에 필시 싸움이 일어날 걸로 생각했다.

 춘성이 그 말을 한 사람을 가만히 올려보더니 물었다.

 "부활이 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요. 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예수님을 믿으시오."

 춘성이 또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라?"

 "그렇소."

 "그럼 너는 내 좆을 믿어라.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죽었다가 도로 살아나는 것은 좆밖에 보지 못했다. 내 좆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너는 내 좆을 믿거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전철 승객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춘성스님 7화: 뽀뽀나 하자]

 

 춘성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인사를 했다. 춘성은 "뽀뽀나 하자"고 달려들었다. 육 여사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잘 대응했다. 육 여사가 박 대통령에게 얘기하니 "근래 보기 드문 큰스님이 나왔구먼."

 

 

 

 

[춘성스님 8화 : 내 큰 것과 네 좁은 곳?]

 

 소견이 몹시 좁은 딸을 둔 노보살이 있었다. 하루는 이 장성한 딸을 춘성 처소에 보내서 소갈머리가 좀 터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다. 춘성이 딸에게 말했다.

 "내 그 큰 것이 네 그 좁은데 어찌 들어가겠느냐?"

 딸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달아났다. 집에 돌아와서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고, "큰 스님은 엉터리요"라고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다.

 그러자 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 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하며 혀를 찼다. 딸은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스님의 법문을 잘못 알아차린 줄 알았다.

 

[춘성스님 9화 : 부처는 똥이고 똥통 속에도 있다]

 

 춘성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함께 탄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다. 춘성이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데가 없다는 말이냐?"

 "그러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이 말은 들은 목사는 춘성을 노려보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화를 내며 물었다.

 "부처님은 없는 데가 없습니까?"

 "없는 데가 없지!"

 "그러면 부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요?"

"부처가 똥이고 똥이 부처인데, 똥통 속에 있고말고. 말할 것이 뭐 있어?"

 

[춘성스님 10화 : 졸음한테 항복 받았다]

 

 춘성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 중일 때의 일이다.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한 겨울에 법당 뒤에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참선수행하다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찬물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정진을 했다.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은 쾌재를 불렀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수행자로서 춘성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었고 서릿발 같은 분이었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수행을 할 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스님에게 들키면 벼락이 떨어졌다

 "수행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야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이리 내 놓아라!"

 춘성은 바랑을 메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온 산하가 그의 집이고 수행처였다. 그 무렵 춘성은 망월사에를 들러 수행하였다. 춘성과 망월사와의 인연은 깊디깊은 바닷물 같은 것이었다. 춘성은 망월사에서 지독한 수행을 거듭하였다. 망월사 뒤에 있는 바위에서 그는 추운 겨울날에 삼매에 들 정도로 참선에 몰입하였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손과 발이 동상이 걸렸다. 그로 인해서 춘성의 말년에는 손톱과 발톱이 썩기도 했다. 춘성이 17일간을 단식을 하면서 죽기 일보 직전에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정황도 춘성의 그 시절 수행력을 짐작 할만하다. --- p.82

 

[춘성스님 9화 : 떨어져 봤어야 알지]

 

 하루는 제자가 춘성에게 질문했다.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야, 이놈아,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춘성스님 10화 : 신도 위해 사냐?]

 

 춘성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학이 스님에게 물었다.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나올까요?"

 스님은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학이 다시 물었다.

 "스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 라고 하자 춘성 왈 "시발 놈의 자식아! 신도 위해 사냐?"

 스님은 입적 후에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를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 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을 비롯한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 등을 부르며 노래자랑(?)을 벌였다고 한다.

 

[춘성스님 11화 :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저에겐 은사가 안계십니다]

 

 춘성은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만해도 춘성을 늘 자랑했고, 춘성 또한 만해의 제자임을 당당히 여기고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수시로 사식을 넣고 면회를 오는 상좌는 춘성 한 사람 뿐이었다. 임정의 위치인 "상해시 보경리 普慶里 4호..." 라는 주소'를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춘성은 만해가 당한 고문 흔적을 목도하고는 1922년 3월 어느 날 스승을 살려내려 법당 소속 토지문서와 등기부를 모두 팔아서 만해의 보석금을 내서 석방하게끔 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에게 도리어 꾸중을 들었다.

 "네 이놈! 절에 딸린 텃밭은 부처님 재산이거늘, 그걸 감히 네 마음대로 팔았단 말이더냐?"

 "텃밭은 나중에 다시 사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될 소리! 너는 부처님의 재산인 사중 땅을 사사롭게 쓰기 위해 함부로 팔아먹었으니 죄 중에도 큰 죄를 지었다. 나는 너 같은 상좌를 둔 일 없으니 오늘부터 당장 내 제자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말라!"

 그 후로는 누가 물어도 춘성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은사가 안계십니다." --- p 79

 

<만해 한용운>

 

 

 걸쭉한 욕설 속에 번뜩이는 禪旨

 

 춘성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큰 감투를 별로 쓴 일이 없었기에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197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욕쟁이 스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춘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걸쭉한 욕설을 무차별로 쏟아내는 스님이었다.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 채 으스대기 좋아하는 여자가 절에 오면 춘성 스님은 아무리 지체가 높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즉석에서 “씨부랄 년!” 이라는 욕부터 쏟아냈고, 값비싼 털옷을 입고 온 여자의 털옷을 벗게 한 뒤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걸림 없이 쏟아내는 춘성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한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참 이상하게도 춘성의 욕설에서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상큼하고 속 시원한 지혜가 번뜩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걸쭉하고 질퍽한 춘성의 육두문자와 욕설 속에 선지(禪旨)가 담겨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춘성은 그의 출가 은사인 한용운에게 자주적인 독립의식을 배웠다면, 만공에게는 선의 정법을 전수받았다. 그래서 춘성은 만공의 입적 후에는 만공의 수법(受法) 제자로도 공인되었다. 1982년 만공문도회에서 펴낸 『만공 법어』의 말미에는 만공의 수법제자의 법명이 나온다. 그 37명의 명단에 춘성의 이름이 당당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만 춘성은 은상좌(恩上座)가 아니고, 참회제자라는 표현을 하였다. 은상좌, 참회제자를 구분한 주체는 만공문도회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경허, 만공으로 이어진 참다운 선법을 누가 올곧게 계승, 실천하였느냐이다. --- p.89

 

 춘성은 근대불교, 현대불교의 격랑의 중심지에서 승려로, 수행자로, 망월사 주지로 그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한용운의 상좌로, 백용성과 함께 『화엄경』사상을 웅변적으로 전하였던 화엄법사로,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하였던 고집스런 수행자로, 시대의 선승 만공 회상에서 지독스럽게 참선 수행을 하였던 간화선 수행자로,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들을 매섭게 지도하였던 어른으로, 서울 시내의 저자거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원색의 언어로 전하였던 스님으로, 수많은 보살들을 부처님 세상으로 이끌었던 고매한 스님이었다.

 춘성의 걸망에는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팬티 하나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 무소유의 실천자였다.

 춘성은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극락이 마음을 떠나 따로 없고, 종교도 본래 없는 것으로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어 사람을 버리게 된다며 종교의 참뜻을 깨우친 선승이기도 하다. 1977년 불국사에서 나이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

 

 

 

 

 

 

저자 김광식 . 법명은 만암卍庵, 호는 지허止虛이다. 건국대 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문학박사), 한국 근 · 현대 불교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부천대 교양과 초빙교수, 조계종 불교사연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연구교수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 연구』,『한국 현대불교사 연구』,『근현대불교의 재조명』,『한용운 평전』,『용성』,『새불교운동의 전개』,『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