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모턴 장편소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A Nervous Splendor)』
오스트리아 소설가 프레더릭 모턴(Frederic Morton, 1924~2015)의 장편소설로 1888년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1888~188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수도 비엔나는 화려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불안해하던 천재들로 넘치던 곳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클림트, 테오도어 헤르츨 등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천재들이 그때 막 꽃을 피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런 천재들 속에 제국의 후계자 루돌프 황태자도 있었다. 그가 1889년 1월 30일 비엔나 숲에 있는 마이얼링 별장에서 십대 소녀와 동반자살 한다.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조건의 황태자는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루돌프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비엔나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아가 루돌프의 죽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참고로, 이 작품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1월까지 공연된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의 원작이기도 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888년 빈, 수많은 귀족이 모인 최신식 극장에서 화려한 사교계 파티가 열리고 있다. 황태자 루돌프는 자신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운 정략결혼, 측근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계략,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아버지와 늘 곁을 떠나 여행을 하는 어머니에 지쳐 세상 모든 것에 자포자기한 상태이다.
한편, 마리 베체라는 자신에게 반해있는 브라간자 대공과의 결혼으로 집안의 재정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신문 속에서 자유를 외치는 기고가 줄리어스 팰릭스를 동경하고 있다.
한창 파티가 진행되던 도중, 한 소녀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처음 마주치게 된 황태자 루돌프와 마리 베체라. 황태자는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마리 베체라의 당돌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얼마 후, 타페 수상의 계략으로 초토화된 신문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그곳에서 마리 베체라는 자신이 동경하던 줄리어스 팰릭스가 바로 황태자 루돌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운명적 사랑이 시작된다.
루돌프는 마리와의 결혼을 위해 교황청에 탄원서를 내고, 점점 감시망을 좁혀 오는 타페 수상에 의해 황제에게 반하는 세력 뒤에 황태자 루돌프가 있음이 드러나게 되면서 점점 황실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그의 연인 마리 베체라 마저 위험에 빠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 루돌프는 유럽의 정치적 혼란기에 태어나 왕실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절대주의를 고수하는 아버지 요제프 황제라는 강력한 벽에 부딪혀 좌절하게 된다. 그사이 시작된 베체라와의 위험한 사랑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게 되고, 결국 동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루돌프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친프랑스적인 개혁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로 자라났기 때문에 친독일적이고 보수적이었던 부친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황제는 그런 아들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고 둘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루돌프는 황태자의 위치를 정치적으로 사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신 율리우스 펠릭스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진보 신문에 부황의 정치와 제국주의 및 황실을 비난하는 글을 여러 번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민중을 억압한다고 보았고 근본적으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외쳤으며 부황의 정치체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부황은 군주제를 고수하였으나 그는 오스트리아의 속국들이 공화제로 기울어감에 따라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루돌프는 벨기에의 공주 스페파니와 결혼하였다. 이는 벨기에와 오스트리아 간의 정치적인 협정을 위한 결혼이었다. 둘의 사이에는 엘리자베트 마리라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이후 스테파니는 병에 걸려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루돌프는 그가 세운 정치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결혼생활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자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던 차에 1887년 10월 사촌인 라리쉬 백작 부인에게서 17세의 마리아 베체라라는 어린 남작부인을 소개받고 둘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소녀는 함께 자살하자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1889년 1월 30일 아침, 그와 마리아는 마이얼링에 있는 사냥용 별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황실은 루돌프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했고 루돌프의 사인은 자살이었지만 바티칸은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이유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황제는 루돌프와 마리아를 만나게 해준 라리쉬 백작 부인의 황궁 출입을 영원히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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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외아들로 여러 분야의 교육을 두루 받았고 많은 곳을 여행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데서 생긴 문제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열망을 품었고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과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뿐 아니라 총리 에두아르트 타페 백작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황제는 그가 국정에 개입하지 못하게 조치했고,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딸인 스테파니와 결혼시켰다(1881. 5. 10). 스테파니가 낳은 딸 엘리자베트 마리는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계승 서열에는 들지 못했다.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진상을 감추려 애썼으나 방법이 너무 서툴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많은 유언비어를 낳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들은 이 사건에 그릇된 해석을 덧붙였고, 낭만적인 작가들은 소문을 멋대로 부풀렸다. 루돌프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가 자살한 가장 그럴 듯한 이유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헝가리인들과의 관계가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위계승자라는 그의 지위는 사촌 프란츠 페르디난트(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음. 그의 죽음은 1차세계대전의 단초가 된다)가 물려받았다. 빈 경찰위원회가 출판한 〈마이얼링의 진상 Das Mayerling-Original〉(1949)에는 자살사건에 대한 공식 조사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K. 로니아이의 〈루돌프 Rudolf〉, R. 바클리의 〈마이얼링으로 가는 길 The Road to Mayerling〉(1958)도 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루돌프 황태자의 생애를 다룬 예술작품들은 많이들 인구에 회자되어왔다. 1936년 아나톨레 리트바크(Anatole Litvak)라는 프랑스 감독이 만든 영화 <비우(悲雨) : Mayling>가 있었고, 1968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으로 오마 샤리프(Omar Sharif)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발표되었다. [메이얼링(Mayerling)]은 1978년 케네스 맥밀런(Kenneth Macmillan)이 안무한 3막 11장의 발레 작품으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음악이 사용되었고, 영국 런던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됐다. 2006년에는 오스트리아, 독일 등 여러 나라의 합작으로 <크라운 프린스>라는 드라마가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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