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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여행생활자가 쓴 다방에 관한 기록『다방 기행문』

by 언덕에서 2011. 8. 3.

 

 

 여행생활자가 쓴 다방에 관한 기록『다방 기행문』

 

언젠가 <포구 기행>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곽재구 시인이 어촌마을과 포구를 여행하며 직접 찍은 사진과 여행에 관한 삶의 이야기를 수록한 내용인데 유장한 필치와 정겨운 풍경들로 인해 몇 번이고 책을 뒤적였던 기억이 난다.

 오늘 소개코자 하는 이 책 『다방 기행문』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여행 작가가 스쿠터를 타고 28개월 동안 전국의 다방을 돌며 그 지역의 사람 사는 모습과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내용이다. <포구 기행>에서 느낀 거장의 무게와는 다른, 솔직담백하고 공감가는 삶의 여러 장면들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한 독서였다. 저자 유성용의 글솜씨는 화려하나 정갈하고, 여행 중의 상념은 소박하나 중후하다.

 

 

 

 

 책을 대하며 작가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나는 EBS 방송의 <한국기행>이나 <세계테마기행>을 자주 보는 편인데 <세계테마기행>에서 『여행생활자』또는 『생활여행자』로 몇 번 출연했던 유성용이란 이가 이 책의 저자이다. 사실『여행생활자』와 『생활여행자』란 TV자막이 눈에 많이 그슬렸던 게 사실이다. 얼마나 팔자가 좋으면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저렇게 여행이나 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는 그러한 나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 책 한구석에서 대답해주었다.

“뭘 하며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고” 종국에는 “끊임없이 나로 살아야만 나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몰아세우는 이들에게 나는 자기 안에 갇힌 기억과 상처가 곧 ‘자신’이라고 여기는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다. 그 방법은 과도하게 포장된 희망과 상처를 줄이고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생의 비의를 봤다고 착각하는 명랑한 눈빛, 물건처럼 살고 싶어 하는 아득하고 간지 없는 유성용은 1971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3년간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지냈다. 그 뒤로 4년간 지리산 화개와 악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맹물 같은 수제 덖음 녹차를 만들며 글을 썼다. 훌쩍 중앙아시아 오지로 날아가, 파키스탄, 티벳,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지를 1년 6개월간 홀몸으로 뚜벅뚜벅 돌아 다녔고, 2005년 귀국했다.

 그는 전주에서 태어났으나 고향이 없고 배를 타거나, 북한산과 지리산 자락 등에서 살았다. 백수의 몸으로 방대한 공해 속을 걷거나 높고 맑은 지구의 변두리를 헤매인다. 다 기울어져 가는 헌집 고치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고 가끔씩 다방에 들러 맹물커피를 마시고 예쁜 레지에게 정답게 팁을 준다. "머리 예쁘게 하고 와라!" 그에게 인생은 슬프고 세상의 모든 것이 더함 없이 체험만 같다.

 'EBS 세계테마기행' 멕시코 편과 이란 편의 큐레이터로 참여하였으며, 『Paper』와 '한겨레신문'에 '스쿠터 전국 다방 기행' 등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여행생활자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 『생활여행자』『다방기행문』등이 있다.

 


 

 유성용은 2년 4개월 동안 스쿠터에 단봇짐을 싣고 전국의 다방을 여행했다. 하필이면 배울 것도 별로 없고, 커피도 맛없는 다방을 왜 이정표로 삼았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그저 사라져가는 것들과 버려진 것들의 풍경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한다. 전국 다방의 커피 맛은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저자는 그 맛을 되도록 이야기가 있는 어떤 맛으로 느껴보고자 했다.

 이 책은 그 의도를 묵묵히 이행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여행기보다도 담담하게, 만나고 스치고 흘러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옮긴다. 그리하여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삶의 ‘그대로인 것’들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다방은 구실이고 매일매일 길들을 따라 내달리는 게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스쿠터에 올라탈 때면 바다 쪽으로 향할 건지, 더 깊은 산간 지역으로 갈 건지를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길은 아무렇게나 내 앞에 이어졌다. 별것도 없는 나무 그늘에 앉아 오후를 보내거나 어느 이름 모를 포구에서 하루해에 오징어가 얼마쯤 마르는지를 살폈다. -본문 90p 중에서


 해안 절벽 위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빈집들을 보면 그대들도 이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말을 말자. 세상에서 이제는 아무런 경쟁력도 없는 막연한 행복의 꿈들은. 그대, 그래도 한번 가거도에 가봐라. 정말이지 세상 끝자락에 걸친 천국의 접경처럼 아름답더라. 높이 솟은 섬등반도의 끝자락에 서 보면 그대가 무슨 천국의 파수병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그대가 꿈꾸던 행복의 안락함을 대면해봐야 하리. -본문 264p 중에서


 세상에는 친구라 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가끔씩 나풀거리는 인생들끼리 나누는 이런 별것 아닌 시간이 정답고 좋았다. 그러면서 아가씨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들었다. 하나같이 가슴 찡한 사연들이었지만 사실 그것들은 이 통속의 세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그네의 예의 같은 것이었으니까. -본문 365p중에서

 

 

 

 

 이 책《다방기행문》은 다방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저자의 문장은 수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여정의 기록에 녹아든 삶의 내밀한 문장들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예뻐지기 틀린 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다방에서 만난 인연들의 의도하지 않은 웃음과 슬픔을 마주하며 다만 생의 속내를 가늠할 뿐이다.

 먼 길 가기에는 아무래도 뭔가 불안해 보이는 스쿠터 한 대에 의지해 저자는 얼음 위를 지나고 단풍 속을 달렸다. 하늘색 스쿠터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꽃잎이 날리고 눈발이 날리고 지나온 길 뒤로 나뭇잎은 흩어졌겠지만 지독한 삶의 여정에 죽음은 늘 함께 했다. 이미 떠난 사람들이 불쑥불쑥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가 하면, 봄날의 삼천포 앞바다에서는 이승과 저승이 겹쳐지고, 아름다운 풍경은 천국으로 이어진다.



 딸기다방, 초양다방, 서부다방, 희다방, 강변다방, 은파다방, 묘향다방, 오우다방…

 

 여행과 생활의 접경에서 살아가는 ‘여행생활자’의 감성은, 잘 알려진 신파처럼 오히려 막연하게 잊혀져가고 있는 다방 안의 풍경과, 사라지는 것들 그 너머에 존재하는 생의 비애를 담담하게 적고 있다.

 대도시에서 다방은 이미 번쩍거리는 카페에 밀려 ‘복고 취향’ 쯤으로 내몰리거나 스타벅스 등 외국자본에 침식해 돈 많은 젊은이들의 전용공간이 되고 말았고,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도 예전처럼 다방에서 담소를 나누며 사람을 기다리는 모습보다는 ‘레지’ 아가씨들이 배달을 가는 모습이 더 흔하다. 그러나 다방은 여전히 그곳을 찾는 손님들은 있고 ‘프림 세 스푼, 설탕 두 개’ 커피와 마담과의 대수롭지 않은 수다가 낡은 소파 한 구석을 채우기도 한다.

 저자는 그런 다방들과 그 사이사이의 오래된 풍경 속을 떠돌며 세상의 흐름을 벗어난 다양한 모습들과 마주한다. 나이 많은 ‘아빠 손님’들은 울면서 들어온 레지 아가씨를 노래로 달래주고, 나그네를 대하는 법에 익숙한 아가씨들은 하얀 국수를 삶아서 끼니를 때워주기도 한다. 바다가 굽어보이는 금산 절벽 위 주막에는 손님보다 먼저 취한 주모가 있다. 민통선 북방 한계 지역을 돌아 동해를 따라 내려온 길은 산과 바다를 끼고 다시 남해로 향한 후 섬과 섬을 거쳐 섬진강과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곳곳의 다방에서, 이발소에서, 여인숙에서, 노인들만 남은 산골마을과 아이들만 남겨진 낮 시간의 산동네에서, 저자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져 이제는 잊혀져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때론 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다방기행>은 아름다운 미문을 읽는 즐거움과 생각할 소재를 잔뜩 제시해주는 오랜만에 만난 좋은 책이다. 삶이 허하다고 느껴질 때, 모든 것이 귀찮아질 때, 혼자 있고 싶어질 때, 어디론가 혼자 멀리 떠나가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으시면 좋겠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