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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초대 받은 사람들'의 삶과 흔적

by 언덕에서 2011. 7. 30.

 

 

 

  

'초대 받은 사람들'의 삶과 흔적

 

 

경남 진주시 지수면 인근은 내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친한 친구가 두 명 있는데 한 친구의 고향이 그곳이고, 나머지 한 친구의 처가(妻家) 또한 그곳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이 마을을 여러 번 들를 기회가 있었고 근처에 천주교 순교자 성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마다 그곳에 한 번 가보리라 여러 번 생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지난 일요일 드디어 방문하게 되었다.

 

 

 

 

 

 

 

 

 

 진주시 사봉면 넓은 들판에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정찬문(안토니오) 순교자의 묘소와 공소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우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 정찬문 순교자는 어떤 분인지 알아보자. 아래의 내용은 성지에 자리한 기념비와 안내문, 그리고 진주향토문화백과를 참고로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정찬문 (안토니오)순교자는 1822년 10월 13일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에서 아버지 정서곤과 어머니 우산 김씨 사이의 양반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고 세례명은 안토니오이다. 그는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정온은 위화도 회군으로 무력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자 절개를 지키려 낙향했던 인물이다. 

 1822년 진주허유고개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정찬문은 대산면 기등공소 신자 칠원 윤씨와 혼인하였는데, 1863년 42세 때 부인의 권유로 입교해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 재위 기간과 고종 즉위 직후에 걸쳐 있는데, 이때는 천주교의 박해의 결정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던 과도기적인 시기였다. 그래서 비교적 박해에 위협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들의 힘들었던 신앙생활은 1981년 최하원 감독이 만든 영화 '초대 받은 사람들'에 나오는 정하상 바오로와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원미경. 분),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 등 당시 신앙생활을 한 천주교인들의 처절하면서도 경건했던 생활 모습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병인양요)으로 발생한 가장 혹독한 천주교인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제2차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천주교인임이 드러나 진주 포교에 체포되었다. 

 이에 놀란 정씨 문중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조사해 달라는 재심을 관아에 청하는 한편 정찬문을 회유하였다. 양반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문중 입장에서는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인이 나타났으니 문중박해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 아문에서는 일방 회유하고 일방 내치어도 소용이 없자 갖은 고문으로 그에게 혹형을 가했다. 신앙을 위해 순교하기로 작정한 그는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갖은 압박과 질책이 가해졌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했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 정찬문은 혹독한 심문을 거듭 받던 중, 매를 너무 맞아 1866년 12월 20일(음)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가 옥중에서 생사를 가늠하지 못할 때 부인 윤씨는 옥리에게 사정하여 간신히 옥에 접근하여 등에 아기를 업은 채로 주먹밥을 전하는 등 옥바라지를 했다고 전해진다. 부인 윤씨는 남편의 치명 때문에 오는 주위의 구박과 수모를 견뎌내지 못하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난 후 소식이 막연했으니 그 직계를 확인할 길은 현재로서 불가하다. 단지, 성지근처인 허유고개 근방에는 정찬문의 방계후손들만이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고 한다.  

 

 

 

 

 

<최하원 작. 영화 '초대받은 사람들'의 한 장면, 자료출처 : 네이버>

 

 정찬문은 1867년 1월 25일 (음력 12월 20일) 나이 45세에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었다. 일설에는 장살당했고 하고(천주교 사봉공소 비문), 또다른 일설에는 참수당했다고 하나(진주향토문화백과), 그는 장살(杖殺)로 인해 순교했고 숨을 거둔 후 별도로 효시경중(梟示警衆)된 걸로 보인다. 이후 친척들이 시신을 요청하자, 관아에서는 효수(梟首)된 머리를 남겨두고 몸만 내어주었다. 정찬문이 양반가의 사람이고 재심을 청구한 문제의 죄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머리없는 몸만 장사를 지냈고, 이곳 사람들과 천주교인들에게 무두묘(無頭墓)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찬문 순교자의 무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48년 서정도 신부와 교우들의 노력과 청찬문의 생질녀로 무촌리 중촌마을에서 나고 출가해 같은 마을에서 줄곧 살아온 당시 85세였던 광산 김씨 텃골(富洞)할머니의 제보가 확인되면서 부터이다. 정찬문의 묘소는 허유고개 비탈길 가에 있었는데, 아무도 무덤인줄 모를 정도로 봉분(封墳)이 허물어져 있었다. 교우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매장을 한 흔적이 완연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 신부는 그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 입관하였다. 그리고 순교자의 묘소를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였고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진주 옥봉성당 주임 정삼규(요한)신부는 옥봉, 문산, 치암, 장재, 사천 본당을 중심으로 ‘정안토니오 순교자 헌양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곳 부지 754평을 확보하고 1975년에 10월 순교자를 이곳으로 자리잡게 했다. 

 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천주교 124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중 한 명이다.

 

 정 안당 . 진주 동면 허유고개 중촌 사는 양반이라. 병인 가을에 진주 포교에 잡혀 혹독한 형벌 아래 죽으니 나이 40세여라.

 - 치명일기 1895년간 기록에서 -  

 

 

 

 

 

 

 

 

 

 

☞  병인박해 :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선교사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주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천주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천주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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