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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전라북도 여행

by 언덕에서 2011. 8. 20.

 

 

주말의 전라북도 여행

 

 

 

전주(全州) 여행 포스팅에 이어 다음날 계속된 전라북도 여행 내용을 정리해 블로그에 실어본다. 전라북도가 여행경비를 일부분 제공하는 여행상품의 제목대로 첫날의 전주 시내 관광에 이어 다음날은 이른 아침부터 전라북도 각 지역을 여행하는 스케쥴인데 짧은 시간이지만 그간 이야기로만 들었던 전라북도 내 명소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나름 의미깊었다. 여행 일정은 전주를 떠나, 고창읍성 --> 고창 고인돌 유적지(고인돌 박물관) --> 선운사 --> 변산반도 --> 새만금방조제 순이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고창군의 고창읍성이다. 고창군의 서쪽은 서해에 면해 있으며, 넓은 들이 많아 전라북도의 주요 곡창지를 이룬다. 한때는 동학세력이 성했던 곳으로 동학농민봉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고창군은 면적 606.8㎢, 인구 62,030(2006)명이다.

 

 

 

 

 

 고창읍성은 사적 제145호. 둘레 1,684m, 높이 3.6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과, 1453년(단종 1)에 축조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벽에 "濟州始", "和順始", "羅州始", "癸酉所築宋芝政"이라고 새겨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계유년에 전라도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벽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동쪽으로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3문(門)과 6치(雉), 2군데의 수구문(水口門)과 옹성(甕城) 등이 있다. 1976년 발굴에서 서문 터의 기둥 주춧돌과 문짝 달던 위치, 동문 터의 기둥 주춧돌을 확인했다. 성벽은 제법 잘 남아 있는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을 쓰거나 초석·당간지주를 깨어서 쓴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읍성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서 행정·군사 시설로 이용되었다. 고창에서는 여자들의 성벽 밟기 풍습이 전해 내려오는데, 이는 한 해의 재앙·질병을 막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고창읍성에서 내려다 본 고창읍내 풍경. 작고 아담하며 아름다운 이 고장에서 살아봤으면 좋겟다. 이 고장의 단아한 풍경은 잘 보존된 역사유적과 자연풍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다.

 

 

 

 

 

 

 

 

 

 

 고창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 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신재효(申在孝.1812.순조 12∼1884.고종 21)는 조선 후기 판소리 연구가로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생으로 45세를 전후하여 판소리의 사설을 정리하는 한편 창작생활에 힘썼다. 판소리의 이론적 체계를 모색하여 <광대가>를 지어 인물ㆍ사설ㆍ득음(得音)ㆍ너름새라는 4대법례를 마련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景福宮)을 중수하고 낙성연을 할 때, <경복궁타령><방아타령> 등을 지어서 제자인 진채선(陳彩仙)에게 부르게 하여,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골라 그 사설을 개작하여,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고 전아(典雅)하고 수식적인 문투를 활용하였다. 따라서 하층계급 특유의 신랄한 현실비판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중인계급으로서 지닌 비판적 의식이 부각되고 사실적인 묘사와 남녀관계의 비속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이로써 판소리가 신분을 넘어서 민족문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 또는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 있는 고창고인돌 유적은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세계적 여행안내서 '미슐랭가이드'에 '꼭 가볼 곳'으로 추천됐다. 미슐랭가이드는 프랑스 타이어회사인 미슐랭이 가볼 만한 세계의 관광지나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여행안내서다.

 국내 최대 규모의 고인돌 밀집지역(약 1천기)인 고창에 산재한 고인돌(447기)은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로 구성돼 있다.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봉대리 일대에는 고인돌과 청동기시대 유물이 산재하며, 고창군은 2009년 고인돌에 관한 소개와 함께 청동기를 비롯한 선사시대 생활을 전시ㆍ체험하도록 고인돌박물관을 개관했다. 박물관 1층은 고인돌 수장고, 3D입체영상실, 기획전시실이 있으며 2층에는 상설전시실, 3층에는 체험전시실, 옥상정원을 갖췄다.

 

 

 

 

 

 

 

 "바위 구멍에 나무로 된 쐐기를 끼우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해서 바위가 쪼개진다. 쪼개진 바위는 아래에 통나무를 레일처럼 깔아 굴려 운반한다. 이런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대규모 노동이 동원된 것으로 보아 강력한 정치권력이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은 이 모든 과정을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하고, 다음으로 체험관에서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쐐기'가 뭔지 '정치권력'이 뭔지 모르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을 나와 700m 정도만 걸어 들어가면,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인 고창 고인돌 유적을 탐방할 수 있다. 크기도 종류도 각양각색인 고인돌 447기가 탁 트인 구릉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인돌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고창의 고인돌 유적지는 모두 여섯 코스로 나뉘어 있는데, 따로 떨어진 제6코스를 제외하고 1~5코스는 나란히 붙어 있다. 박물관 측에서 운영하는 고인돌 탐방열차를 타면 편리하게 모든 코스를 돌아볼 수 있지만, 여유 있게 즐기기에는 코스마다 탐방 시간이 빠듯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걸어서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코스를 꼼꼼히 돌아도 2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가을에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임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나는 송창식이 부른 이 노래가 참 좋다. 물론 한여름에 동백꽃이 필 리 없는데, '선운사' 하면 항상 생각나는 노래이기에 노래가사를 떠올려 보았다.

 

 

 선운사 입구 계곡에는 맑은 물이 지천이어서 즐겁게 물놀이하는 하동들의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이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린 날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감동하여 절을 세웠다는 설과, 그보다 2년 늦은 55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 또는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행호(幸浩)선사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德源君)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는데, 1613년(광해군 5)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여 1619년 완성했으며, 그뒤 근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보물 제290호)·영산전(靈山殿)·명부전·만세루(萬歲樓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산신각·천왕문·대방(大房)·요사(寮舍) 등이 있다. 절에 전하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동불암마애불상(보물 제1200호)·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과 중종과 부도 및 탑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밖에 다수의 조상(彫像)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부속암자는 현재 4곳만 남아 있지만 19세기 전반에는 50여 개나 되었으며, 절 주위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龍門窟), 전망이 뛰어난 만월대(滿月臺),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禪雲寺)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벽(壁)’이라는 시가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1941년에는 그동안 쓴 시를 모아 처녀시집‘화사집(花蛇集)’을 출간했는데, 신성(神性)과 육신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육욕이 충돌하면서 빚어낸 찬연한 생명세계를 그린 것으로 한국 현대시사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집 한 권으로 미당은 일약 한국 최고시인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 즈음 미당은 부친상을 당해 고향을 다녀가게 되었다. 상을 치른 후 유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올라가려고 선운사 입구 버스정류소를 향해 가던 중, 문득 처연한 외로움에 사로잡혀 근처 주막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40대 여주인이 혼자 있어 대작을 벌이다 육자배기 가락을 청했다. 이 때의 기억을 살려 후일 쓴 시가 지금 선운사 입구 서정주 시비에 새겨진‘선운사 동구’다.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 담긴 이 시는 이후 선운사를 최고의 여행명소로 자리 매김 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방문 당일 선운사는 법회행사 중이었다. 하늘을 향해 형형색색 달린 연등이 정갈하고 다채롭다.

 

 

 

 

 

 

 

 

 방송이나 잡지 등에서 자주 소개되는 선운사 입구에는 고창의 명물, 풍천장어 식당이 여러 군데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요리의 비법, 레시피가 많이 알려진 탓인지 도시의 식당에서 파는 민물장어 구이의 맛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내 입이 고급인지 맛이 일반화 된 것인지…….

 

 

 

 

 

 

 

 차는 고창을 떠나 변산반도를 거쳐 새만금방조제로 향하고 있다. 창가에서 바라본 변산반도 드라이브길은 서해안의 절경이라 할만하다.

 

 

 

 

 

 

 

 새만금방조제는 전라북도 군산시와 고군산군도, 부안군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길이 33.9km이다. 새만금간척사업의 1단계 사업으로 건설된 방조제로, 1991년 11월 16일 착공한 후 19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0년 4월 27일 준공하였다.

 

 

 

 

 

 

 

 새만금방조제는 길이 33.9km, 평균 바닥 폭 290m(최대 535m), 평균 높이 36m(최대 54m)로, 세계 최장 방조제로 알려진 네델란드의 주다치 방조제(32.5km)보다 1.4km 더 길다. 방조제 준공으로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된 새만금간척사업은 2020년까지 내부개발사업이 진행될 예정으로, 농업(35.3%)·생태환경(21.0%)·산업(13.8%)·관광레저(8.8%)·과학연구(8.1%)·신재생에너지(7.2%)·도시(4.0%) 국제업무(1.8%) 등 8개 용지로 구분하여 개발될 계획이라고 한다. 내가 아주 늙어 있을 2 ~ 30년 후의 이곳은 상전벽해가 되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금쪽'같은 땅이 되어있기를 기원해 본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가 4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를 본 적이 있다. 둘레가 몇 아름은 족히 넘을,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고목은 그 마을 가운데 자랑스레 뿌리를 내리고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파란 가을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해서 살며시 다가가 악수하듯 손을 대어보았다. 4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결같이 저 자리를 지키며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왔구나, 저 은행나무에 비하면 나는 아직 풋내기에 불과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나무 앞에서 겸손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느껴지는 것도 그렇다. 잘난 척 살아가지만 자연과 세월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휴식과 더불어 모르는 것을 알게 만드는 여행이 때로 때때로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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