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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찔레꽃 / 송찬호

by 언덕에서 2011. 4. 25.

 

 

찔레꽃 

 

                          송찬호 (1959 ~ )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에서

 

 


 

 

그녀가 지닌 추억들을 순화시키고,

새로운 불빛 아래서 우주를 재창조하고,

해질녘이면 피에트로 크레스피의 라벤더 향기를 회상하며 몸을 떨고,

사랑이나 증오 때문이 아니라 고독에 대한 심오한 이해로

레베카의 비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줄 시간이 아직 있었을 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중에서

 

제가 읽었던 최고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위의 라벤더 향기는 찔레꽃 향기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요? 따가운 햇볕 내리쬐는 숲길을 걷다보면, 길섶 양지 녘에서 쉽게 만나는 하얀 꽃이 있습니다. 찔레꽃이지요. 찔레꽃은 장미의 한 종류입니다. 정확하게 하자면 들녘이나 숲에서 스스로 자라는 들장미인데 화려한 꽃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미의 친척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질박한 꽃이군요.

 식물학의 공식적인 이름에 ‘들장미’라는 이름의 식물은 없다고 합니다. 들에서 피어나는 장미 종류의 식물들을 편하게 들장미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찔레꽃은 우리나라의 들 어디에서나 저절로 자라는 대표적인 들장미입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지요. 물론 찔레꽃은 흔치 않게 연분홍색의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또 아예 붉은 꽃을 피우는 ‘국경찔레’라는 종류도 있다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찔레꽃은 흰색이네요.

 찔레꽃에 가난하게 살던 옛 처녀의 전설이 전하는 건 찔레꽃이 풍겨오는 소박한 아름다움 탓이지요. 고려 때 원나라에 끌려갔다 십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찔레라는 이름의 처녀가 있었습니다. 찔레는 그리운 가족을 찾아 헤매다 목숨을 잃었는데, 그녀의 넋은 꽃이 되고, 가족을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는 향기로 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요.

 찔레라는 이름은 여느 장미가 그렇듯 가지 전체에 가시가 돋아 만지려 하면 가시에 찔리게 돼서 붙었다고 합니다. 하얀 찔레꽃이 피어날 때 처녀 총각들은 깨진 사기그릇 조각에 연애편지를 담아 찔레꽃 덤불에 몰래 감추어두었다고 합니다. 위의 시에서 사기사발 조각이 나오는 것은 여기에 연유하는군요. 애절한 사연의 그 편지를 끄집어내려면 일쑤 찔레 가시에 찔려야 했다지요. 아, 장사익의 노래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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