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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앞날 / 이성복

by 언덕에서 2011. 5. 9.

 

 

 

Claude Monet(1840 ~ 1926) 작 'The Jetty at le Havre Bad Weather'

 

 

 

 

 

 

 

 

앞날

 

                          이성복 (1952 ~ )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문학과 지성사)

 

 

 

 

 

 

 

 


 

 

 

 

 

 

철학을 공부하는 교수가 이성복 시인의 위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슬픔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도취에 빠진 사랑의 맹점이 주는 아픔을 읽는다고 한 장면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예로 든 중국 고대사상가 장자의 바닷새 이야기에서는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사랑하여 좋은 음식과 술을 주고 악기를 연주해주는 등 최고의 대접으로 왕의 사랑을 표현하지요. 그러나 그 새는 일주일 만에 죽어버립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알려고 하는 이기적인 존재이지요. 여기서 사랑의 비극이 발생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는 다른 규칙을 가진 타자라는 사실은 냉혹하군요. 이 사실을 외면한 노나라 군주의 일방적인 바닷새 사랑이야기는 타인의 사랑을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랑이 일방통행일 때 그것은 형벌에 가까운 것임을 이 시는 이야기합니다.

 위의 시집에는 아래와 같은 시도 있군요.

“나는 당신이 그리 먼데 계신 줄 알았지요 지금 내 살갗에 마른 버즘 피고 열병 돋으니 당신이 가까이 계신 줄 알겠어요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당신이 조금 빨리 오셨을 뿐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요 당신 손잡고 멀리 가고 싶지만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오는 당신, 우리 한 몸 되면 나의 사랑 시들 줄을 당신은 잘 아시니까요” - <병든 이후>

 다가서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서는 당신과 나는 끝내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에서 제시하는 사랑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당신과 내가 한 몸이 되면 사랑이 시든다고 화자는 당신의 생각을 대변하는군요. 내가 병들어 있으므로 당신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끝내 하나가 되면 그 사랑이 시든다는 시적 발상은 아마도 이성복 시의 근저에 깔려 있는 이원론으로 보입니다. 당신과 내가 가까이 있음으로 파생되는 긴장이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서러움의 얼굴 또한 그러합니다. 이 <병든 이후>의 시적 어법이 한용운적이라고 느껴지지만, 이성복의 시가 머금고 있는 이원론은 근원적으로 한용운과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님은 부재하지만 항상 함께 있고,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 한용운 시의 시적 화자가 기루어하는 님이라면, 이성복 시의 화자는 언제나 분화된 대타의식의 대상으로서 당신을 인식합니다. 한용운에서 이성복에의 거리가 그동안 서구의 문화적 충격 속에 배타된 사랑의 방법적 변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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