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에서 구보 박태원을 만나다
1982년에 발생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란 게 있었습니다. 대충 생각나는대로 기억을 더듬어보면 개요는 이렇지요.
고신대 학생이던 문부식씨는 1982년 3월18일 오후 2시쯤 같은 대학 동료 김은숙·이미옥씨와 함께 부산 대청동에 있는 미 문화원에 들어가 기름을 뿌린 뒤 불을 지르고 달아났습니다. 비슷한 시각 국도극장과 유나백화점 앞에서는 “미국과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가 적힌 전단지가 뿌려졌구요. 강풍 때문에 미 문화원에 붙은 불은 쉬 잡히지 않았고 1시간이나 탔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 문화원 도서관 내에서 책을 보던 동아대 학생 한 명이 숨졌습니다. 독재정권의 눈치를 보던 언론들은 다음날 사회면에서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며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사건 발생 14일 만에 문부식·김은숙씨가 함세웅 신부를 통해 자수했지요. 이어 문씨에게 영향을 준 광주민주화운동 수배자 김현장씨가 체포되었습니다. 김현장씨는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의 보호하에 2년 가까이 숨어 있었던 걸로 기억나네요. 전두환 정권은 최 신부 역시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정권은 천주교가 ‘좌경분자’를 숨겨줬다고 비난했고, 천주교 측은 교회는 범죄 혐의자라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도와야 한다며 반박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이 거론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꼬리를 내렸구요. 그러나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민주화를 갈구하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고 그 현장인 미문화원은 역사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진의 이 건물은 일제 때는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으로 해방 후에는 미군숙소와 '미문화원'으로 외세 지배의 상징적 장소가 되어왔습니다. 1999년 반환되어 부산근대문화전시관으로 사용중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군요.
장황하게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소개한 것은 휴일날 미문화원 옆을 지나가다가 바라본 미문화원 건물이 이제는 미문화원이 아니고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뀐지 십수년이 지난 것 같은데 나 자신의 게으름 탓에 미처 들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도 있고... 원래 부산의 중심지역이었던 이곳이 신 도심인 서면이나 시청, 해운대 지역에 밀리면서 지역이 소외된 탓도 있을 것같네요. 마침 <근대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라는 전시회가 진행 중이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소설가 박태원(1909 ~ 1986)은 경성제일고보 졸업 후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의 예과를 중퇴했습니다. 1926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시 <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30년 [신생(新生)]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지요. 그는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 <천변풍경(川邊風景)>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8ㆍ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작가의식의 전환을 꾀한 바 있고, 6ㆍ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李泰俊)ㆍ안회남(安懷南) 등을 따라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를 역임하다가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물려 작품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0년 복위되었지요.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부분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세태소설의 측면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표한 <우맹(愚氓)>, <골목 안>, <성탄제> 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지요.
이 전시회에서 박태원의 많은 흔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보 박태원(1909~1986)은 이상,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꾸려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소설가입니다.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을 통해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1950년 한국전쟁 중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북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지요.
전시해설을 구보 박태원의 차남인 박재영씨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인민군 군복 3벌 세탁해 준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5년을 복역했어요.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감옥을 나오셨지요. 북한으로 가신 아버지는 1970년 녹내장으로 실명하고 두 번의 뇌졸중으로 반신불수의 상황에 빠졌는데, 원고지 모양의 틀에서 손으로 작업하다 그게 여의치 않으니 구술로, 나중엔 그저 청각 신호로 평생 소설을 집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시된 유품 중엔 1930년대 문단을 주름잡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글과 그림으로 축하 메시지를 남긴 결혼식 방명록이 눈에 띕니다.
첫 장엔 '이상(以上)'의 글이 보이네요.(소설 '날개'를 쓴 그 유명한 이상 김해경입니다)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 업고/ 慢畵의 實演(실연)에 틀님 업다/ 慢畵實演의 眞摯味(진지미)는/ 또다시 慢畵로 輪廻(윤회)한다.' 흩어지다란 뜻의 '漫'자 대신 게으를 '慢'자를 썼는데, 말장난에 능했던 이상(李箱)다운 위트입니다. 박태원은 구인회 동인들 중에서도 특히 이상 김해경과 친했다고 합니다. 박태원은 이상을 모델로 한 작품 '애욕' '제비' 등을 발표했고, 이상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었다지요.
만화가 웅초 김규택은 남녀가 포옹하는 간결한 드로잉과 함께 '조쿠나 조아 Fish Skin 쓸일 決코 업겠소'라고 적었습니다. '피쉬 스킨'은 물고기 껍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대의 라텍스콘돔 대용의 천연재질 콘돔으로 사용했던 것이니, 문장의 뜻은 미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식자층인 그들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형이하학의 육담은 보편적이었나 봅니다. 그들은 젊었으니까요. ㅎㅎ 이밖에도 시인 정지용, 소설가 이태준, 소설가 조벽암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과 예술인들의 축하 글이 담겨 있군요.
이 전시회는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구보 박태원의 문학세계를 대표하는 작품과 유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는데, 지나가는 길에 볼만한 내용이 풍부하여 추운 날씨를 잠깐 잊을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산근대역사관>은 명칭대로 부산의 근대유물이 일목요연하게 잘 전시되어 있습니다. 부산근대역사관을 자세히 관람하려면 1~2 시간은 족히 걸린만한 CONTENTS를 보유하고 있군요. 근처에 지나칠 일이 있으신 분에게 관람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 歲暮, 어느 날의 풍경……. (0) | 2010.12.28 |
---|---|
휴일날 거가대교를 가보았더니... (0) | 2010.12.21 |
Malaysian girl - Irene wong cheng chai (0) | 2010.12.03 |
사계四季 (0) | 2010.11.27 |
휴일날 걸어보는 부산의 갈맷길(해안길) (0) | 2010.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