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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00편 감상

저구마을 아침편지 / 이진우

by 언덕에서 2010. 12. 7.

 

 

저구마을 아침편지

 

                                       이진우(1965 ~ )

 

 

<경남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 '저구마을' 전경>

 

 

 

 

행복한 풍경

 

 창 밖에 달린 풍경(風磬) 얘기로 저의 첫 글을 열겠습니다. 풍경은 바람과 어울려 수다를 잘 떱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찾아오는 바람이 늘 같은 바람은 아닌가 봅니다. 소곤소곤, 두런두런, 시끌벅적, 투덜투덜…별 모양이 다 있나 봅니다. 아이는 학교 가고 아내마저 어디 가고 없는 날, 목을 빼고 창 밖을 내다보노라면 풍경은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를 내지요.

 바람이 많은 바닷가 마을이기는 해도 풍경이 입을 다물 때도 있습니다. 저녁 9시, 막차가 끊어지면 아직 잠들지 않은 불빛도 꾸벅꾸벅 좁니다. 나지막하게 울리며 빈 마을을 지키던 풍경이 기척조차 없을 때면 창문을 열고 바람의 행방을 수소문합니다. 풍경이 한숨을 쉬듯 한 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돌리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은 줄 알 뿐입니다.

 걱정이 많아 뒤척이는 밤일수록 풍경은 말이 많아집니다. 달래 준다고 하는 말이 오히려 오던 잠마저 내쫓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이내 풍경 소리에 생각의 자리를 내 주고 맙니다. 풍경 소리에 취하면 어느 새 꿈결이고, 아침입니다. 각자의 마음에 간직할 풍경 소리 같은 편지를 매일 띄워 볼 작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오늘은 우리집 개 별이가 이상합니다. 먹을 걸 들고 나가면 제 새끼들을 젖히고 달려오던 녀석이었거든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별이는 새끼들이 밀치며 달려들어도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먹을 걸 든 손을 향해 제비 새끼마냥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새끼들 뒤에 엉거주춤 섰습니다. 먹을 걸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주춤거리다 한 걸음 물러나고, 어느새 달려온 새끼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맙니다.

 극성스럽게 장난을 치는 토토와 토토보다 좀 늦게 젖을 뗀 투투. 어미젖 말고도 맛있는 게 많다는 걸 알아 버린 새끼들을 바라보는 별이의 눈빛이 오히려 편안해 보입니다. 그러다 아예 엉덩이를 깔고 앉은 별이-. 그 모습에서 밥상머리에 앉으면 맛있는 건 자식 입에 먼저 넣어 주시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늘 한 걸음 물러나 자식들을 지켜보시던 어머니.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러한가요? 어머니가 뒤에 계실까봐 감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떠나는 사람들

 

'저구마을 아침편지'를 신문에 내보내게 되면서 잊고 살던 서울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안부 끝에 한결같이 어떤 이유로 이 먼 곳까지 왔는지 묻더군요. 도시를 떠난 게 무모하거나 경이로워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한 동네에서 집을 옮길 때도 여러 이유가 따라붙습니다. 하물며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팽개치고 국토의 끝자락으로 떠나 왔으니 궁금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한번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95년 대구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걸 겪으면서 미래에 대한 꿈도 무너졌습니다. 삼풍백화점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친구는 아예 베트남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얼마 후 서울을 등지기로 하였답니다.

 여기 저구마을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데 삼 년이 더 걸렸습니다. 몸을 부대끼며 얻어낸 확신이었기에 무엇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인생의 역전 따위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부디 이 누추한 인생이 별 탈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루

 

이 마을의 아침 나절은 토끼 뜀박질처럼 빨리 지나가고 점심 무렵은 참새처럼 수다스럽고 오후는 황소 걸음처럼 느긋합니다. 집집마다 밥 짓고 생선 굽는 냄새가 풍겨 나오면 해도 알아서 수평선 너머로 넘어갑니다. 하루 동안 무얼 했는지는 물가에 앉아 손을 씻다 보면 알게 됩니다. 손에 묻은 흙 자국이나 냄새가 그 기록입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소박한 찬이 놓인 둥근 밥상. 밥보다 둥글게 머리를 깎은 아들과 대문니가 모두 빠진 딸, 밥 냄새 은은하게 묻어 나는 아내가 둘러앉아 맛있게 하루를 먹습니다. 뉴스에도 없고 역사책에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저녁입니다.

 봄 준비에 바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주 앉아 다음날 할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부엉이 새끼들처럼 야단법석입니다. 밤이 깊어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세상도 따라 잠이 듭니다.

 이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다른 하루를 어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줄 모르는 부모는 자식보다 더 철이 없습니다. 철이 없어서 걱정도 없습니다. 걱정이 없으니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배추꽃처럼

 

노란 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배추꽃이 따가운 봄볕에 다 지더니 씨가 맺혔습니다. 김장에 쓰고 남아 꽃 보려 남겨 놓은 배추였습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튀어나올 듯 잘 영글었네요. 배추는 씨 하나에서 시작해 배추가 되었다가 꽃을 피우고 다시 씨를 맺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가지요.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아버지는 제가 못마땅했습니다. 글 쓴다며 부모를 봉양할 생각도 않고 제 식솔도 제대로 못 먹여 살리는 저를 늘 꾸짖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삶에 무책임한 사람이 어찌 좋은 글을 쓰겠느냐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글 쓰는 사람은 돈에 욕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제 가족은 가난했습니다.

 배추꽃의 한해살이를 보며 저라는 사람, 배추만도 못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저를 낳아 준 부모와 형제, 제가 낳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사는 게 글보다 중요하다 여기게 되었지요. 저도 가족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다른 사람처럼 씨앗이 되어 땅에 묻히렵니다. 늦었지만 온 힘을 다해 가족의 행복을 꽃 피워 보겠습니다.

 

 


 

이진우. 소설가. 시인. 수필가. 번역가. 1965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으로 등단했고, 1994년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를 출간했다. 장편소설 『오감도』『적들의 사회』『인도에 딸을 묻다』『메멘토모리』등을 출간했다. 산문집 『해바라기 피는 마을의 작은 행복』외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시전문사이트 시인학교(http://www.poetschool.net)발행인이며, 거제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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