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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조지 오웰과 장편소설『 1984년』의 배경 사건들

by 언덕에서 2010. 3. 12.

 

 

조지 오웰과 장편소설『 1984년』의 배경 사건들 

 

 

 

 

 


조지 오웰(1903~1950)의 본명은 에릭 블레어이다. 에릭 블레어는 1903년6월 25일에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의 벵갈에서 태어났다. 에릭의 아버지인 리처드 블레어(Richard Walmesley Blair)는 식민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 이다 블레어(Ida Mabel Blair)는 에릭이 두 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튼스쿨(고등학교)을 졸업할 무렵에는 167명중 138등을 할 만큼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 이 성적으로는 옥스퍼드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식민지 관료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오웰은 어린 시절 계급차별을 느낀 경험이 있었으며 이튼에서는 그것을 더욱 체계적으로 인식했다. 이튼의 생활에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이튼의 교육은 학생들을 식민 관료, 군인, 제국주의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아직 에릭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 - 버마의 나날

 

 에릭은 옥스포드에 진학할 성적도 여유도 되지 않았으므로 버마에서 인도 제국 경찰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당시 인도 제국 내의 한 주였던 버마(현 미얀마)를 부임지로 선택하였다. 당시 버마는 90명 정도의 영국인 경찰 간부가 13000명 정도의 현지인 경찰을 관리했고 그들이 13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장악했다.

 에릭이 가혹한 식민통치자의 똘마니는 아니었으나 불교 승려들과 매춘부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는 훗날 제국주의자임을 거부했던 글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체화되어 있었다.

 

그는 5년간이나 식민 관료 생활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깊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1927년 휴가차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아버지가 35년간 근무하여 가족이 '중류 생활자'로 지내게 해준, 그리고 자신에게 5년간 영국 신사로 지낼 수 있도록 했던 신분을 차버린 것이다. 오웰의 두 번째 저서인 '버마의 나날'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비극적인 로맨스가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반제국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홈리스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1928년에 그는 이모가 살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살 생각을 하고 건너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몇몇 잡지에 기고할 수 있었지만 종종 접시닦이로 하루 13~17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1929년에 돈도 없고 병이 들어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1931년 그는 다시 밑바닥 생활을 하였다. 런던의 빈민가에서 홈리스 생활을 하고, 켄트로 가서 호프 줍기 노동을 하루에 열 시간씩 3주간 한 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서 호손즈 학교의 교장 자리를 얻어 1933년까지 근무한다. 

 오웰은 1933년에 그의 첫 번째 저서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는 그의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이 매우 리얼하게 묘사되어있다. 첫 번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순들을 묘사함에 있어 아주 신랄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밑바닥 생활을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런던의 속어와 욕설을 정리해둔다거나 구빈원 시스템의 모순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등 다층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오웰다운 위트가 곳곳에 넘친다.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왜 사회주의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6년 초에 오웰은 빅토르 골란츠의 의뢰로 영국 북부의 공업지대 실업자에 대한 책을 의뢰받았고 그 결과물은 1937년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로 출간되었다. 1부는 과도한 공업화로 피폐해진 랭커셔와 요크셔의 생활실태와 가계조사 등으로 이루어져있고 2부는 자신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왜 사회주의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맞추어 서술되어있다. 이 책에서 북부의 석탄이 북부 사람들을 어떻게 착취하여 남부에 부를 가져다주는지, 그리고 왜 민중들에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 지지를 받고 있는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얼마나 교조적인 태도로 민중들과 동료들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서술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맹목적인 소련 숭배를 비판했다. 이 책은 오웰이 사회주의자로서의 의식을 표출한 첫 번째 본격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노동운동보다는 공산당에 매몰되는 친소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보수파들은 나치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특히 좌파 지식인들은 오웰이 나치도 스탈린도 모두 전체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을 소련의 동유럽 '진출'과 나치의 '침략'을 혼동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웰의 현실 인식이 관념적이지 않고 정확했다는 것 뿐 아니라 이후 스페인 내전에의 참가로 이어지는 오웰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민중중심적인 아나키즘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웰은 탁월한 현실 인식 능력을 가진 반권력의 작가였다.

 또 오웰은 '배운'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 등의 말을 사용하는 것에 주목했다.  '동지'라는 말 따위를 억지로 사용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문화가 피착취 계층이자 잠재적 사회주의자들인 중산층의 마음을 떠나가게 했다며 사회주의자들이 종종 사회주의의 적이 되곤 한다고 비판한다. 또 영국의 뿌리깊은 계급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으며 서로 다른 계급(먹고살만한 노동계급과 가난한 지주계급 등)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오웰은 본질적이지 않은 차이 때문에 주적에 대항하는 연대가 깨져서는 안된다는 점에 대해 얘기했던 것이다.

 이 책의 2부는 오웰의 자서전이라고 할만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 오웰은 자신이 어떻게 제국 경찰에서 피압제자들의 친구가 되어보기로 시도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태생적 계급을 어떻게 넘을 수 없었는지 고백한다. 이는 그의 첫번째 르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쓴 동기이기도 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그는 위건의 탄광노동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결국 계급 차이 따위는 극복하고 전면적인 반 파시즘 연대로 가야한다는 것을 주장했고 이 책의 원고를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결과물이 또 하나의 걸작 르뽀 《카탈로니아 찬가》이니, 오웰이 쓴 세 편의 르뽀는 모든 억압에 반대한다는 그의 사상적 궤적을 순차적으로 꿰어준다.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와 에스파냐 내전

 

 

 

 1936년 겨울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지하기 위해 참전했다. 그는 독립노동자당을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갔으며 곧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당(POUM) 민병대에 지원했다. 당시 카탈루냐 지방은 공화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노동자의 나라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영국 북부의 참혹상을 보고 온 오웰은 여기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의용군의 조직은 형편없었으며 총도 없이 아라곤 전선에 배치받았다. 하지만 장교에서 사병까지 누구나 똑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계급으로 차별을 받지 않았다. 넉 달 이상 전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한 채 추위와 굶주림에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전쟁이었다.

 오웰은 전선에서 돌아와 마드리드의 국제여단에 참여하려고 신청했다. 국제적인 연대를 받는 곳에서 공화파의 승리를 위해 더 기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바르셀로나에 혁명적 기운은 사라지고 다시 계급이 형성되는 듯한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화파는 각종 노선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 강해지고 있었으며 POUM이 점거중인 전화국을 탈취하기 위해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당이 총격을 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오웰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던 국제여단으로의 참여를 포기하고 다시 POUM 소속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누구나 평등했던 부대 내에 다시 계급이 생겨 오웰은 소위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 참여 10일 만에 그는 머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훗날 오웰은 '총알에 맞는 것이 총알에 맞지 않는 것보다 행운이었던 상황'이라고 회고했다. 1mm만 왼쪽에 맞았더라면 즉사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오웰은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그는 공산당으로부터 트로츠키파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미 아내 아일린 또한 가택수색을 당한 상태였고 두 부부는 간신히 야간열차를 타고 스페인을 빠져나왔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전쟁의 어리석음과 스페인 인민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르포문학의 걸작이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정치상활에 대한 분석까지 실어서 스페인 내전을 미시적이면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오웰이 죽을 때까지 초판이 다 팔리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무시당했다.

 

동물 농장과 제 2차 세계대전

 

 

 

 1944년 2월에 탈고된 '동물 농장'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신랄한 비유로 가득차 있어 한동안 출간되지 못했으며 그 와중에 런던 공습에 의해 원고가 불타버릴 뻔 하기도 하였다. 《동물 농장》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산주의로 읽혀 미국에 의해 광범위하게 번역되었다. 최초의 외국어 번역은 놀랍게도 한국어 번역이었으며 이것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첨예하게 냉전이 벌어진 지역이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종 동화로 분류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오웰은 《옵서버》의 특파원으로 파리와 쾰른으로 다녀왔다. 그리고 1945년 3월에 삶의 동반자였던 아일린이 죽었다. 전쟁이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계속 언론을 탄압하자 오웰은 '자유방어위원회'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전쟁이 벌어졌던 시기 내내 오웰은 참여적 지식인으로 살아왔고 《동물 농장》이외의 글은 대부분 잡지에 기고된 현실적 논평이거나 에세이였다.

 

위험한 전체주의와 1984년

 

 

 

《동물 농장》으로 유명 작가가 된 오웰은 런던이 싫어져 1946년에 스코틀랜드 주라 섬으로 이주했다. 양자 리처드를 자연 속에서 키우면서 '《1984년》을 집필하기 시작해 1947년 말에 탈고했지만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폐결핵의 악화는 그의 심신을 탈진시켰고,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의 처지로 대변되어 나타난다. '만약 병이 그렇게 심하지만 않았다면 이 소설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듯이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위트가 없는 책이 되었다. 1948년 11월에 최종 탈고한 오웰은 48을 뒤집어 1984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삶의 소박한 것들을 사랑해왔던 오웰은 그것이 박탈된 근미래를 묘사하여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하였다. 《1984년》은 출간 즉시 고전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오웰은 다시 폐결핵으로 입원했고 병상에서 소냐 브라우넬과 1949년 10월에 재혼했다. 그녀의 이미지는 《1984년》의 줄리아로 표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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