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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아동문학가 방정환

by 언덕에서 2010. 3. 9.

 

민족의 장래를 어린이에게서 찾았던 방정환

 

              <소파 방정환>


소파 방정환(1899~1931)은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로,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 문학의 선구자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를 떠나서 한국의 아동 문화, 아동 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른의 소유물로만 취급 받아온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 눈물, 용기, 기쁨을 키워 주기 위한 동화, 소설, 시 등 아동 문학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소파는 1899년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9세 때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14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만에 그만두고 열여섯 나이에 벌써 [청춘]지에 글을 투고했다.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33세의 짧은 생애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 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도요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 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날` 운동을 범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 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하면서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년 운동이 좌익 세력에 의해 자기의 참뜻과 차츰 달라진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 순례 강연으로 자기 길을 걸었다. 당시 그의 동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 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차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그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방정환 문학에 대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는 평도 있지만 그는 우리 아동 문학의 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먼저 아동 문학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많은 작가를 길러 내었다. 비록 33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지만,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방정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해 낸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형제별>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비운을 별 삼형제로 의인화하여 비극성을 더한 작품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동요이다. 이는 어린이에게 감성해방의 길을 열어 주려 한 소파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대표 동요 <귀뚜라미>, <가을밤>, <늙은 잠자리> 등에서는 뛰어난 시의식의 세계를 보여 주는데, 특히 〈가을밤〉은 현대 동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설 <만년 셔츠>에서는 가난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 작품이다.

 

짓눌리고 가난하고 웃음을 잃은 식민지 치하의 어린이에게 슬픔을 달래다


 1922년 <안데르센동화>, <그림동화>, <아라비안나이트> 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 명작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하였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며 창작 동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7월에 통권 122호로 일단 중지된 아동 잡지[어린이]는 옛날 이야기식 동화나 창가조의 동요에서 탈피하여 창작 동화와 동요를 적극 보급하였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통해 짓눌리고 가난하고 웃음을 잃은 어린이에게 슬픔을 달래 주고 슬픔을 함께 하며, 역경을 극복하는 슬기를 가르쳤다.  또한 이 잡지를 통해 이원수, 마해송 같은 아동 문학가들을 배출하였다.

 방정환 동요는 한 마디로 아주 쓸쓸하고 슬프다. 흔히 방정환 동요를 눈물주의, 감상주의로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원수는 이 감상성이 '꿋꿋한 의지와 함께 있는 여린 연민의 정의 소산이요, 그것은 억압당하는 민족의 슬픔과 구박받는 아동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같은 글)이라 했다. 방정환 동요를 읽어보면 이원수의 이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미망인 손용화 여사는 방정환과의 길지 않은 결혼생활이 가치있는 삶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삶이 어린이를 통한 민족운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1901년 의암(義菴)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로 태어난 손 여사는 1917년 두 살 위인 18세의 소파와 결혼, 어린이운동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 “기미년에 왜놈들이 밤마다 들이닥쳐 마룻장까지 뜯어내며 가택 수색을 했어요. 그리고 걸핏하면 남편을 잡아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분이 그때 골병이 든 것 같아요.” 그토록 소파를 못살게 굴던 일경들이었건만 정작 소파가 세상을 떠나자 문상을 왔었다고 전한다.

 

아동문학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비원(悲願)의 발현


 방정환은 3ㆍ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셋째 사위로서 젊은 나이로 <독립선언문>을 돌리다가 일경에게 피검될 정도로 처음부터 구국 운동에 앞장 선 이였다. 그러다가 3ㆍ1운동이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좌절되지만 그는 천도교의 총의가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기로 굳어져 갈 때 소년운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사람들로부터 경시당하자 스스로의 생애를 이 길에 바치게 되었다.

 그는 이미 분파적 기성 세대의 머리와 힘으로는 국권 회복의 길이 요원한 이상 그들에게 미래를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오직 자라나는 제2세 국민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일제시대 어린이날 포스터>

 

 그가 아동문학운동과 문화운동에 전생애를 바치게 된 것은 한 사람의 문학자로서 또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자각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오히려 국권 회복을 위한 비원(悲願)의 발현이었다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견해라 할 것이다. 그가 몸담았던 [개벽]지와 [어린이]지가 민족주의적 색채 때문에 일제치하에 가장 록심한 삭제-압수-휴간-폐간의 고초를 겪었다. 그 자신도 종로경찰서와 서대문 형무소 미결수 감방을 항다반으로 드나들었다.

 특히 [어린이] 잡지 매호에 게재된 우리의 옛 모습 우리의 얼 우리의 것에 대한 계몽과 소개 그리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통한 적나라한 민족의식 앙양은 그야말로 칼이 아닌 붓으로서의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나날이 말살되어가는 민족문화를 다음 세대에 일깨워주고자 하는 살신성인의 피나는 도정(道程)이었던 것이다.

 

 <1923년에 제정 제작된 5월1일 어린이날 포스터>

 

 나라의 내일을 짊어질 겨레의 제2세에게 그가 쏟았던 정성을 오늘의 어른들은 또 어떻게 해석하고 계승하고 있는 것일까. 어린이를 무턱대고 출세주의로만 몰고 가는 어버이들, 어린이를 상업주의의 도구로 이용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다. 어린이를 한 집안을 꾸려가는 일꾼으로만 생각하고 조국의 내일을 담당할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어버이들, 경제 부국으로 도약했다고 하지만 양극화의 그늘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 교육기회의 불평등, 날로 포악해져 가는 학교폭력, 잊을 만하면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는 어린이 성범죄...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소파 정신을 곰곰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봐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