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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 100인 작품

천재화가 이인성(1912 ~ 1950)의 그림

by 언덕에서 2009. 8. 28.

  천재 화가 이인성(1912~1950)의 그림   

 

 

 

 

모자를 쓴 자화상 1950 나무판에 유채

 

 

 

온일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2 x 90cm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35.5x45cm

 

 

 

정원  1930  캔버스에 유채   90.9x89.3cm

 

 

 

책 읽는 소녀  1940  캔버스에 유채  40.9 x 31.5cm

 

 

 

여름 실내에서  1934  캔버스위에 수채  71x89.5cm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어촌 덕적도 풍경  캔버스에 유채  32 x41cm

 

 

 

 

 

 

 

이인성. 서양화가. 11세에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5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동진이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계속 작품창작에 힘쓰는 한편, 영과회ㆍ향토회 등 대구의 미술가단체에도 참가했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한 이래 줄곧 출품했다. 제10회부터 연속 6회 특선했으며, 제14회전에서는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고, 1937년 제16회부터는 서양화부의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이 되었다. 또한 1932년부터 일본의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전(帝展) 및 신문전(新文展)에 입선했다.

 추천작가가 된 이후에는 화단의 엘리트로서 그 지위를 굳혀갔으며, 1940년에는 김인승ㆍ심형구와 함께 추천작가 3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6ㆍ25전쟁 중인 39세 때 경찰관과 시비 끝에 총기사고로 죽었다.

 

 20대 중반의 청년기에 타고난 재능을 최대로 연소한 그는,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법으로 재치 있게 소화하고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다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그로부터 처음 보인 것이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해서 그의 수채화는 그전까지의 독특한 창조성이 빛을 잃어 갔다. 그것은 유화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실적인 수법의 인물ㆍ풍경ㆍ정물 그림을 계속 그렸으나 재기의 절정기와는 달리 그의 특질이 약간 엿보일 따름이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 일제시대 선전(鮮展: 국전 전신)에 17세의 나이에 최연소 입선한 것을 비롯, 37세에는 최연소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현대미술 도입기에 구상회화의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던 작가이다.

 그를 천재화가로 부르는 것은 이미 10대부터 예술가적 재질을 인정받았다는 사실도 있지만, 20대에는 일본인들과 당당하게 겨루어 선전에서 연4회 특선을 차지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예술성 자체가 이미 20대에 완성의 형식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인성은 특히 초등학교만 나왔으나 후에 그의 재질을 아낀 지방의 유지들이 동경 유학을 주선했으며 반골적 기질로 기행(奇行)을 서슴지 않아 예술가적 고독을 혼자 되새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27세에 대구에서 다방을 경영한 적도 있으며 결혼한 지 4년만에 부인이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30대를 우울증과 고독으로 보냈다.

 이인성 작업의 예술성은 그가 시도했던 유화, 수채화, 수묵화, 릴리프 등 다양한 매재에 대한 실험 양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경쾌한 마티에르와 드로잉은 당시 일본 화풍에 젖어 있던 한국 서양화단에서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켰으며 분할묘법의 시도, 목가풍의 서정주의 등을 정착시킨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경주의 산곡에서><계산동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