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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 100인 작품

진보주의 미술가 이쾌대(1912 ~ 1953)의 그림

by 언덕에서 2008. 12. 24.

 

 

 

 

 

진보 미술가 이쾌대(1912 ~ 1953)의 그림 


 

[군상-4(1948)].

 

 

 

 

 

[해방고지.(1948)]. 



 

 
[봄처녀. 1940년대 말].
 

 

[부녀도. 1941].   

 

 

이쾌대가 40년대에 그린 드로잉 작품들. [마부(왼쪽)]와 [한민이].   

 

 

 

 

[탁자위의 정물. 1943]    

 

 

 

 

  [걸인. 1948]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군상

 

 

 

 

첼로

 

 

 

봉선화

 

 

.운명

 

 

 

 

이인 초상 Portrait of two people_캔버스에 유채_72×53cm_1939

 

 

자화상 Self-portrait_목판에 유채_45.7×38cm_연도미상

 

 

 

이여성 초상화 Lee Yeo Sung_캔버스에 유채_90.8×72.8cm_연도미상

 

 

 

드로잉 Drawing_종이에 펜_17.5×19.5cm_연도미상

 

 

 

 

 

 

이쾌대(1912 ~ 1953) : 한국의 화가. 조선신미술가협회 등을 조직하여 진보적 미술가로 활동했다. 후에 좌익 노선에 실망하여 정치색을 배제한 작품으로 선회하였으나 6·25전쟁 이후 다시 남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였다. 휴전 후 북한으로 갔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했다. 휘문고보에서 장발(張勃)의 지도를 받았으며, 재학 중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전에 입선하였다. 이어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입학, 1941년에는 이중섭(李仲燮최재덕(崔載德)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서울에서 수차 작품전을 가졌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조선미술동맹에 간부로 가담, 진보적 미술인들의 조직을 이끌었다. 1947년을 전후하여 평양에 가서 공산당 정국이 미술가들에게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들만 그리도록 강요하는 것을 보고 실망, 좌익 노선의 조선미술동맹에서 이탈하여 정치성 배제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어 1949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때에는 추천작가로 참여하였으나, 1950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좌익계열인 남조선미술동맹에 가담하였다. 이어 인민군 측 종군화가로 전선에 참가하던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휴전 직후 남북 포로교환 때에 북한을 택해 갔다. 초기부터 인물화에 주력하였으며, 구도나 인물표현에 있어 단단한 해부학적 수련을 바탕으로 서양의 고전주의 기법을 이어받았다. 8·15광복 후에는 조난(遭難)(1948) 등 해방 후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대표작품으로 작품(1938) 운명(1938) 부인도(1943) 탁자 위의 정물(1943) 걸인(1948) 추과(秋果)(194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