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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백마고지(白馬高地) / 김운기

by 언덕에서 2009. 8. 15.

 

 

 

 

 

 

 

 

 

백마고지(白馬高地)


                                       -제9사단 제28연대 제6중대장 김운기 대위

 

 

백마고지 잔인한 어머니, 그 품속에 말없이 누워

하늘의 별을 세는 땅 위의 별들을 본다.

우람한 원시의 생명과 작은 들꽃의 향기와

새들의 노래 대신, 포탄의 잔해와

화약냄새와 그 밑의 생명이

별이 되어 쉬고 있는, 그 산은 백마고지

다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다가서고 싶은 그리움도 민통선에 묶이는 산

395고지 백마산, 이름 없는 능선이

세계의 戰史에 떨친다

언제면 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산은 산으로 돌아오려나.

 

 


 

 - <용산 전쟁기념관 자료실>

 

 



*백마고지 : 1952년 10월 6일, 저녁 장융후이[江擁輝] 장군이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은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을 이끌고 철원 서북방 395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 명에 국군 제51·52·53포병 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4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9일 동안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 인민지원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0월 15일 오전에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와중에 산정상은 3m나 깎였다. 속살을 보인 산 정상 하얀 바위들이 백마를 닮았다고 하여 395고지가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위의 시는 기성시단의 유명 시인이 쓴 시가 아니다. 6.25 전쟁 중, 참전군인이 생과 사가 오가는 치열한 전투 중에 낙서처럼 적었던 절절한 메모이다. 하긴 유명한 시인이 썼다고 다 좋은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중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시를 두 편씩 원고지에 적어오라고 숙제를 주셨다. 모두들 나름대로 머리를 짜서 엉터리 시를 지어갔지만 엉뚱한 친구 한 녀석이 유명 시인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시를 베껴서 제출했다. 국어 선생님은 우리들이 제출한 시를 읽으시며 일일이 촌평을 하셨다. 마침내 녀석이 제출한 작품을 보셨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모두들 숨을 죽였다. 선생님은 '이것은 시가 아니라 단어들을 배열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글을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야단치셨다. 수업이 끝난 후 모두들 웅성거렸다.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주된 의견은 '유명시인의 시를 베껴서 제출한 것은 물론 잘못이지만 일개 중학교 국어교사가 유명시인의 작품을 저렇게 모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옳으셨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유명 시인의 시집을 읽었는데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가 무책임한 단어배열과 관념의 유희들로 가득 찬 낙서장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시인이 너무 많은 나라의 비극인 것이다.

 최영미 시인은 지난 100년간 한국어로 쓰인 100편의 명시를 고르라면, 감히 김운기의 ‘백마고지’를 꼽겠다고 했다. 하늘을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르다 목숨이 꺾인 젊은이들에게 백마고지는 ‘잔인한 어머니’며 '하늘의 별'이었을 것이다. ‘하늘의 별을 세는 땅 위의 별’은 죽은 전우들이다. 들꽃 같은 군인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동존상잔의 피비릿내 나는 6·25전쟁을 가슴 저리게 적고 있다. 세계적인 거장이 만든 그 어떤 영화보다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별들. 산산이 가루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진 들꽃 같은 그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김운기 대위라는 분이 누군지 궁금했다. 다행히 그가 적은 수기류의 자료가 몇 가지 있어 일부를 소개한다.


"자, 가자! 지금부터 낙오하는 놈은 용서 없어!" 대위는 이렇게 소리치며 선두에 나섰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이봐, 소위! 귀관은 뭐야?" 대위는 나를 쏘아 보았다. "예, 저는 00연대 하사관 교육대 구대장입니다." "귀관은 머저리구만." "예?" "따라오지 말구 귀관의 부하들을 수습하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수습해야할 병사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철의 삼각지> 김운기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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