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은희경 장편소설 『마이너 리그』

by 언덕에서 2014. 4. 17.

은희경 장편소설 『마이너 리그

 

 

 

은희경((殷熙耕. 1959 ~ )의 장편소설로 2001년 발표되었다. 1958년 개띠 동창생 네 친구의 얽히고설킨 25년 인생을 추적하면서 '마이너리그'란 상징어로 한국 사회의 '비주류', 그러나 실제로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해당할 수밖에 없는 '이류 인생'의 흔들리는 역정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갖가지 허위의식, 즉 패거리 주의, 학벌주의, 지역 연고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마이너 인생'을 애증으로 서술한다. 독자들은 좌충우돌하는 4인방의 행태에서 웃음과 동시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권두의 '작가의 말'에서 "내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은 한때 내가 남성성에 대한 신랄함을 갖게 했다. 이제 나를 세상의 남성과 화해하게 만든 것은 삶의 소수 안에서의 동료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불완전한 도중(道中)에 있다"라고 썼다.

 '작가의 말'에는 이 소설을 쓰는 데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거나 소재가 된 남자들의 명단이 소개되는데,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두 명 포함되어 있어서 이채롭다. 이야기에는 네 사람의 친구가 나온다. 학교에서는 사고뭉치, 이름난 말썽꾸러기들이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 남들보다 잘살아 보려고 딴에는 별별 노력을 다해 보지만, 남들만큼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남들보다 잘사는 것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듯한 한 남자들이다. 1970년대나 1980년대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곧잘, 그 시절을 떠오르게 했던 유신의 잔재인 까만 교복, 교련복, 그리고 귀에 익숙한 댄스음악, 이웃 여학교를 흘끔댔던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 작가는 여기 나오는 1958년 개띠들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고 아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소설가 은희경(1959 ~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들, 김형준· 배승주· 장두환· 조국은 고교시절 동창생으로 만난 친구들이다. 그들은 70년대 중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아주 사소한 인연으로 '만수산 4인방'으로 엮여 통칭되기 시작하고 좋든 싫든 서로 몰려다니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문제아들이다. 작중화자인 김형준은 책가방 속에 항상 남들이 모르는 고상한 책들을 넣고 다니며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는 데 성공한 자칭 '수재'이다. 그 성숙하고 냉소적인 시선에 비치는 그들의 에피소드에는 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의 풍속이 하나하나 재현되며 8,90년대 한국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사고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유신시대의 '긴조', 월남패망, 교련실기대회, 올드팝송, 이소룡, 임예진, 재일교포간첩단사건, 휴거 등이 이 시대의 아이콘들이다.

 이들 4인방의 '우정'에 미묘한 파장을 던지는 존재는 이웃 여고의 지적이며 아리따운 여학생 소희이다. 소희는 김형준과의 인연으로 4인방에게 알려졌지만, 정작 그녀와 사귀게 되는 사람은 역시 그녀를 탐내는 조국과의 각축전에서 승리한 희멀건 한 미남 배승주이다. 이리하여 승주와 소희 커플은 그들 사이에서 공인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던 어느 날 소희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전혀 엉뚱한 인물인 두환과 야반도주를 하고 만다.

 두환이 빠진 나머지 셋은 고3 시절을 보내고 나란히 '그저 그런'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10·26과 '광주'라는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사건들을 먼발치에서 맞으며 대학생활을 한다. 그들에게 두환이 돌아온 것은 12년 만인 87년 6월 항쟁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두환과 함께 출분을 감행했던 소희는 교통사고를 당해 싸늘한 주검이 된 채였다. 나머지 셋은 원망과 연민과 뒤범벅된 채 두환을 맞지만, 두환은 다시 그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살아가게 된다.

 사회에 진출해 엉터리 사진작가의 조수로 일하는 조국, '사업구상업'이 직업인 승주, 그리고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인 형준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함께 뭉쳐 기획사에서 일을 하게 되고 그들은 브라질로 이민 가서 자수성가한 교포사업가를 만나 '대형프로젝트'를 기획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마이너일 수밖에 없는 그들은 메이저급 기획사 때문에 비참하게 물을 먹고 만다. 나와 내 가족이 잘 살아보겠다는데 하며 이들은 세상의 불공평을 한탄한다. 이들은 한번도 메이저로 나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누구는 너무 소심해서, 누구는 말만 앞서서, 누구는 타고는 버릇을 개 못 줘서다. 우스꽝스럽고 가엾은 이 친구들은 측은하면서도 연민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생은 쭉쭉 뻗어가기보다는 그럭저럭 꼬여들었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안에서 서열을 메기고 역할을 맡기고 죄과를 묻느라 수선을 떨었다. 남자의 인생과 사내들의 우주, 그 성취와 좌절에 대해 진지한 금언을 남기느라 목젖을 떨어댔으며 때로 소주잔 위에 눈물을 뿌리고 낯모르는 이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어쨌거나 가족을 부양했고 그런 틈틈이 겸연쩍어하면서도 모르는 척 자질구레한 죄를 저질렀다. 그러는 동안 그들 모두 공평하게 사십을 넘겼다. 만수산 드렁칡.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 2004

 

 

 이 소설에는 폭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마이너리거가 아닌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제도나 인습을 향한 폭력을 휘둘러야 하는 귀결을 이야기하는 건데 불행히도 작중의 주인공들은 애매모호할 뿐이다.

 나는 팀워크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 팀워크가 없는 게 아니라 책임의 소재와 그 영역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월급쟁이 사회의 팀워크란 깡패집단과 다를 바가 없다. 개인의 조건과 취향이 고려되지 않는다. 술자리가 만들어 지면 단체로 2차와 3차까지 가야하고 단체로 사우나에 가야하고 단체로 미아리에 가서 쇼를 봐야하고 단체로 여자를 사서 서로의 옆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것들이 다 팀워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다. (본문에서)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 같다. 누가 저 유신시대에 앞장서서 최루탄 앞으로 뛰어가는 투사가 될 것이며, 또는 누가 1980년대에 일류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와 강남 비싼 땅에 집을 사고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살고 있는가? 실은 능력이 없고 소심해서라기보다는 여기 나오는 이들처럼 여러 가지 상황과 상황들이 모여 이들의 삶을 여기까지라고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은 목욕탕에서 막 때를 밀고 나온 사람들에게나 하는 말이라고 주인공은 이야기 하지만 그의 용기 없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안쓰러운 것은 우리 또한 이들과 비슷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 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지나치게 선하거나 무척 똑똑하거나, 집안 배경과 환경이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지 못하다. 이곳 저곳에 눈을 돌리고, 좌절하고, 포기하면서, 눈치 보게 되고 돌아서게 되고 속물이 되어간다.

 

 

 문학평론가 이성욱은 "이 소설은 심각하지 않다. 4인방의 행각은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거니와, 때문에 마이너 인생으로 사는 것이 그에 마땅한 세상의 배려라는 생각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래서 문면으로만 봐서는 사회적 문제와 별 연관이 없는 서사로 읽힐 수도 있으며 동시에 심각한 읽기의 자세가 비약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이 자꾸 우리 현실의 문제 상황과 얽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자못 심각한 상상력의 발동은 맥락 없는 비약이 아니다. 계급문제보다 오히려 학벌문제가 더 문제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우리 현실을 상기할 때 끈 떨어진 연으로 살 수밖에 없는 4인방의 인생행로는 단지 그들을 웃음의 대상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의 삶과 개성이 넘치는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발칙할 만큼 섬세하게 집어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모양과 함께 우리 사는 모양을 되짚어 보면서 다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렇다면, 20년 후에는 지금을 어떻게 떠올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