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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염상섭 장편소설 『만세전(萬歲前)』

by 언덕에서 2014. 2. 27.

 

 

 

염상섭 장편소설 만세전(萬歲前)

 

 

 

염상섭(廉想涉. 1897 ~ 1963)의 장편소설로 [신생활] 잡지에 1922년 7월부터 <묘지(墓地)>라는 제목으로 2회까지 연재되다가 3회분은 삭제당한 채 이로 인해 잡지가 폐간되자, 1924년 [시대일보]로 옮겨져 『만세 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완결되었다. 3ㆍ1운동 전야의 암담한 현실을 배경으로 민족의 비애와 그 속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치욕스런 인간 군상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동경 유학생인 주인공이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를 다루고 있는 여로형 소설이다. 특히 귀국하는 과정에서 3.1운동 이전 조선의 식민지 현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현실 폭로의 측면을 지니는 동시에, 이를 경험한 식민지 지식인의 자아 각성이 함께 드러나 있다. 주인공 ‘나’는 ‘동경 → 고베 → 시모노세키 → 부산 → 김천 → 대전 → 서울’에 이르는 여정을 거치면서 억압과 핍박 속에 병든 조선의 현실을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조선의 암담한 실상을 눈과 귀로 확인한 주인공의 경악과 울분, 좌절감은 후에 염상섭 문학의 또 다른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밑거름이 된다.

『만세전』은 1919년 이전의 일제치하 암담한 현실을 배경으로 민족의 냉철한 비판 의식을 담은 소설이다. 고루한 사고관을 가진 부친, 보수적 성격의 전형인 형, 그리고 자학적, 감상적 성격의 ‘나’를 등장시켜, 사기꾼인 ‘김의관’을 통한 인간 집단에의 혐오, 경멸을 묘사하는 가운데 몰락해 가는 중산 계급의 한국인의 모습을 비판하였다. 이 작품을 읽으면 소설 속의 주인공 이인화와 알베르토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뮈르소를 비교하게 된다. 염상섭은 『만세전』을 1924년에 카뮈는 <이방인>을 1942년에 각각 발표했다. 염상섭의 위대성은 이런 면에서도 엿보인다.

 

 

1924년 [시대일보] 연재된 <만세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에 유학 중인 '나'(이인화)는 서울에 있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연말 시험도 포기한 채 귀국한다.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원만하지 못했던 부부 관계 등으로 '나'의 마음은 음울하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정자(靜子)'가 있는 술집에 들러 술도 마시고, 카페에도 가 보고, 음악학교 학생인 '을라'도 만나 본다.

 귀국하는 배에 올라서도 짓궂게 미행하는 일본 형사에게 계속 시달리면서 울분을 삭인다. 배 안의 욕실에서 우리나라 노무자들을 경멸하는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라 없는 설움과 압박과 곤궁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나라 노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에 휩싸인다. 그런 상황은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서울의 집에 와 보니, 현대 의학으로 넉넉히 고칠 수 있는 유종(乳腫)을 앓고 있는 아내를 방치한 채, 아버지는 술타령이나 하면서 재래식 의술에 맡겨 결국 아내를 죽게 만든다.

 집안에는 출가했다가 과부가 되어 돌아온 누이, 종손인 종형, 그 밖의 과객들이 득실거려 도무지 안정을 얻을 수가 없다. 다시 유학길에 오르려 하나, 집안 식구들의 만류로 발이 묶였고, 재혼을 하라는 형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중(喪中)에, 일본에 있는 '정자'의 간절한 편지를 받는다. 새 길을 찾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에게 새 출발을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돈 백 원을 보내 주었다.

 사회고 집안이고 간에, 구더기가 들끓는 공동묘지 같은 답답한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나'는 불쌍한 아내, 사랑보다 연민이 앞섰던 가련한 아내를 생각하면서 탈출하듯 다시 동경으로 떠난다.

 

1924년 4월 6일부터 『시대일보』가 창간되면서 제목을 <만세전>으로 바꾸어 개재하였다. 같은 해 6월 4일까지 59회로 완결되자, 이 해 8월 고려공사에서 저자 이름을 양규룡으로 하여 개작을 거쳐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1948년 2월에 다시 개작되어 수선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만세전」은 전체적으로 주인공이 동경을 떠났다가 다시 동경으로 돌아간다는 여로와 회귀의 구조를 보이는 아주 특이한 작품이다. ‘동경→ 김천→ 서울→ 동경’의 여로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 동경은 현실 도피의 탈출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나'(이인화)가 아내의 병으로 귀국했다가 아내가 죽은 뒤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여로 형식의 작품이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다양한 현실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면서 특히 한국인을 대하는 일본인의 자세와 당시의 조선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서울과 동경을 배경으로, 한 지식 청년의 눈에 비친 사회상의 기록이라 하겠다. 즉, 만세 운동 직전 무단 정치라는 식민지 정책 아래 신음하는 조선 사람들의 모습과 자아 비판적 각성을 냉철하게 묘파한 작품이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주인공은 옷을 사고 이발을 한 후, 술집으로 애인 시즈코부터 찾아간다. 그는 아내가 죽거나 말거나 사실은 무관심하면서 허겁지겁 달려간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시즈코를 안는다. ‘나의 행위는 나의 자율적인 선택에 달려있으며 어떠한 선험적인 도덕도 여기에 간섭할 수 없다’는 근대적 자아의 각성이 주인공의 위악으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주인공의 위악이 『만세전』을 평범한 지식인 소설과 분리시킨다. 세계는 악하지만 나 역시 악하다고 인정할 때 세계와 사물은 좀더 객관적이고 좀더 공평하게 보이게 된다. 근대화되는 세계의 사물은 좀더 객관적이고 좀더 공평하게 보이게 된다. 근대화되는 세계의 비인간성을 감상적으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보와 타락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생겨난다. 『만세전』에서 나타난 이 ‘위악의 눈’은 이후 염상섭 문학의 가장 큰 강점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염상섭 소설은 오늘날 모더니티의 의미가 다시 운위되는 한국 사회와 문학에서 선구자적 업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염상섭은 이 작품에서 비정상적 인간의 생경한 이념 토로로 일관되었던 초기의 작품들(<표본실의 청개구리>, <제야> 등)의 세계로부터 진일보하여 현실을 실감 있게 묘파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만세전』은 염상섭의 2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 경향인 리얼리즘 소설의 구축에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암울한 현실을 '묘지'와 같이 인식한 것은 좋으나, 이의 개선을 위한 어떠한 정신적 고뇌도 보이지 않고 동경으로 떠남으로써 현실 도피적 결말을 가져온 것은 이 작품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