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단편소설 『약속(The Promise)』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 1874~1965)이 20세기 중반에 발표한 단편소설로 <The Complete Short Stories of W. Somerset Maugham> 시리즈에 수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단편소설『약속』은 나이 차이를 극복한 사랑과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 그리고 자기희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사랑의 본질과 인간관계의 포용성을 이야기하면서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러한 주제는 현대 문학과 실존주의 문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개인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에 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약속』은 철학적이고 비교문학적인 맥락에서도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가이자 화자인 ‘나’는 어느 날 호텔 식당에서 혼자 밥 먹다가 역시 혼자 밥 먹기를 마친 엘리자베스 버몬트라는 오랜 여자 사람 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이제 50대이지만 여전히 미모를 자랑한다. 그녀는 명문가 공작의 딸로 18세에 부호와 결혼하여 사치와 향락 끝에 2년 만에 이혼당했다. 그때 그녀는 간통자로 지목된 3명 중 1명과 재혼했으나 18개월 뒤 남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당시 그녀는 애인을 줄줄이 갈아치우며 도박꾼에다 난잡한 행실로 악명을 떨쳤다.
이후, 그녀는 40살의 나이에 피터라는 21살의 남자와 재혼했다. 친구들은 재앙을 예언했다. 엘리자베스는 한 남자에 6개월 이상 헌신할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이 이유였다. 10년이 지났을 때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그녀의 남편 피터는 그녀와 10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바버라 캔턴이라는, 외무부 차관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그날 ‘나’는 호텔에서 혼자 밥 먹다가 엘리자베스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피터와 이혼하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십 년 전 그이가 내게 청혼할 때 내가 약속한 게 있어요. 그이가 떠나고 싶어 할 때 놔주겠다고. 우리 사이에는 지극히 큰 불균형이 있어서 나는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그 약속을 지킬 거예요?” 내가 물었다.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는 게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오늘 여기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 거에요. 그이가 바로 이 테이블에서 내게 청혼했거든요. 그때 우리는 여기서 같이 식사했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었죠. 한 가지 걸리는 건 내가 그때나 다름없이 그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고, 나는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음, 그만 가 봐야겠어요. 피터는 기다리게 하는 사람을 싫어해요.“
그 남자는 천년이 지나도, 그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절대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정직한 여자야, 하고 나는 다시 되뇌었다.

서머싯 몸의 단편소설 「약속」은 겉으로는 간결한 대화와 단정한 서사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의 깊이는 절대 얕지 않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정직함이란 무엇인가?’, ‘약속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한 여성의 품위와 고통을 통해 서술한다. 작품 속 화자인 ‘나’는 화려한 삶을 살다 이제는 고요하고 씁쓸한 현실과 마주한 엘리자베스 버몬트를 호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과거 향락적이고 무절제한 삶을 살아왔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내면에 정직했던 여인이다. 그 정직성은 사회적 도덕률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내부의 윤리에서 비롯된 독립적인 태도였다.
엘리자베스가 청춘을 훌쩍 넘긴 나이에 21살의 피터와 결혼했을 때 모두가 그 결혼을 조롱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사랑을 '시간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불균형한 관계 속에서도 일종의 도덕적 계약을 자발적으로 체결했다. '그이가 떠나고 싶어 할 때 놔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언젠가 끝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고 끝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
이 작품은 단순히 나이 차이가 많은 연하남과의 로맨스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은 윤리 의식과 자기희생을 역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사랑’이란 감정보다 ‘사랑에 관한 약속’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끝내 지켜내려 한다. 그녀는 이 약속을 ‘정정당당한 행위’로 간주하며, 이로써 인간의 품위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주인공 여성이 호텔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장면은 그 자체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연극적 무대다. 한때 청혼받았던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이제는 사랑을 보내는 결심을 한다. 이 장면은 사랑이란 얼마나 덧없고도 견고한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날 때, 화자는 말한다. '그 남자는 천년이 지나도 그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절대 모를 것이다.' 이 한 문장은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고독한 동시에 얼마나 숭고한지를 절묘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이처럼 짧은 이야기 속에서 삶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품위를 조화시킨다. 단편소설 『약속』은 말하자면, 사랑의 끝자락에서조차 타인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한 인간의 고귀한 패배 혹은 가장 아름다운 자발적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독자는 그 상실의 품위 앞에서 오래도록 침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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