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이 말하는 기억의 비밀 『기억의 과학(Pieces of Light)』
영국 심리학자 찰스 퍼니 휴(Charles Fernyhough, 1968~)가 쓴 심리학 저서로 2020년 출간되었다. 프루스트 현상부터 중세 수도사들의 기억술 그리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과학과 역사, 문학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를 종횡무진 오가며 기억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깨는 책이다. 영국왕립학회 윈튼 과학도서상 최종후보작, [영국 생물학회 도서상] 수상작, 「선데이 타임스」, 「인디펜던트」, 「뉴 사이언티스트」 올해의 책 등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는 대개 기억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의 반은 ‘스토리텔링’이고 허구로 채워진다.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진짜 기억이 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은 기억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힘이 작용한다고 본다. 하나는 ‘일치의 힘’이다. 사실에 충실하게 기억을 끌고 가는 힘이다. 다른 하나는 ‘일관성의 힘’이다. 자신의 현재 목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믿음에 모순되지 않도록 만들려는 힘이다. 기억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힘이 든 이유는 기억이 가진 ‘일관성의 힘’ 때문이다. 기억은 일관된 자기 정체성과 믿음을 유지하려는 힘으로 인해서 허구적으로 꾸며지기도 한다.
기억을 과학적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이유 역시 이러한 기억의 특성에 있다. 기억은 도무지 측정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주관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게 혼란스럽다. 사람들 모두가 과거를 다르게 기억한다. 저마다 과거를 다르게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란 쉽지 않다. 지은이가 최신 뇌영상 연구와 다양한 심리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기억을 다루면서도 스토리텔링이라는 언뜻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기억에 대해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의 기억 상실,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고 기시감에 갇혀 있는 사람,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 인해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 모든 노래를 이미 다 들어봤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신의 기억에 대한 자체 실험까지 지은이가 두루 살피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
『기억의 과학(Pieces of Light)』은 인간의 기억이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저장하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재구성의 과정임을 탐구한 심리학 저서다. 퍼니휴는 이 책을 통해 기억의 본질과 그 형성 과정을 과학적 연구와 개인적 이야기로 풀어내며,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여러모로 살펴본다.
1. 기억의 재구성적 특성
퍼니휴는 전통적인 기억 이론에서 벗어나, 기억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저장하고 되돌려 보는 것이 아니라 매번 우리가 기억할 때마다 현재의 감정, 관점,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기억은 변화하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 이런 재구성적 성격은 특히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에 두드러지며 우리의 정체성과 자아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과학적 연구와 개인적 이야기의 융합
저자는 심리학적,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기억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면서도 자기 경험과 다양한 사례를 통해 기억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과학적 설명뿐만 아니라 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서술을 통해 독자가 기억에 대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과거의 사건을 선택적으로 떠올리고 또 그 기억이 현재와 미래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서술한다.
3. 기억과 정체성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억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자서전적 기억이 개인의 인생 서사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분석한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변하며 자아의 역동성을 반영한다.
4. 기억의 왜곡과 착각
저자는 기억이 때때로 왜곡되거나 심지어 '가짜 기억(false memory)'을 만들 수 있음을 설명한다. 외부의 암시나 우리의 기대, 현재의 감정 상태가 기억을 변화시킨다. 이는 때때로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사건조차 진짜처럼 기억하게 할 수 있다. 저자는 여러 심리학 실험과 사례를 통해 기억이 어떻게 우리의 기대와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한다. 이를 통해 기억의 불완전성과 주관성을 탐구하며 기억이 완벽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5. 기억의 발달과 퇴화
이 책에서는 기억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달하고 퇴화하는지도 다룬다. 특히 유년기 기억과 노년기의 기억 상실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기억이 단순히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기억의 가소성(plasticity)과 뇌의 구조적 변화가 기억 형성과 유지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과 자아를 보여주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또 기억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소유’하고 훔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억은 마치 우리의 뇌 안에 있는 CD 도서관처럼 차곡차곡 쌓아두고 언제든 불러올 수 있는 것일까?
기억은 우리가 흔히 착각하듯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언제든 유연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기억은 과거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필요할 때면 들여다볼 수 있고 소환될 수 있도록 저장된 CD의 도서관이 아니다. 기억은 현재에 맞게 우리의 감정에 따라 이야기되고 재구성된다. 그런 점에서 기억은 단지 ‘과거’만이 대상이 아니며 '현재'와 '미래'도 재구성의 요소가 된다. 우리가 뭔가를 기억할 때는 이미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 『기억의 과학』은 기억에 관한 과학적 이해를 심리학적·철학적·신경과학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기억이 단순한 정보 저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우리 정체성을 형성하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임을 설명한다. 또한 과학적 연구 결과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독자들이 기억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이 책은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과 우리의 일상 경험과 인간 정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高朋滿座' 카테고리의 다른 글
NGO와 빈곤에 관한 가장 리얼한 보고서 『빈곤의 광경(貧困の光景)』 (2) | 2025.04.05 |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8) | 2024.10.05 |
진화에 대한 유전자 중심적 관점을 대중화 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두 번째 (3) | 2024.09.21 |
조선시대 민간 설화집 『고금소총(古今笑叢)』 (0) | 2024.06.15 |
버지니아 울프 평론집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 | 2024.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