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장편소설 『영원한 남편(Вечный муж)』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Dostoevski Fedor Mikhailovich. 1821∼1881)의 장편소설로 1870년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1870년에 잡지 [서광]에 연재되었고, 187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외국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다. ‘영원한 남편’이라는 제목은 주인공 바벨로비치의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상징한다. 그는 항상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영원한 남편」이라는 제목은 주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소유 당하는 존재로서의 남편인데, 바벨로비치는 결혼 생활 내내 아내에게 복종하고, 아내의 배신을 알게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아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원히" 남편의 역할에 묶여 있다는 점을 상징한다. 둘째, 사회의 전형적인 남편상으로, 도스토옙스키는 바벨로비치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 남편이라는 역할이 어떻게 굴레로 작용하는지, 어떻게 아내와의 관계에서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를 표현했다. 바벨로비치는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아내의 영향을 받으며, 남편으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영원한 남편'은 주인공의 복잡한 심리적 고통과 부부 관계에서의 권력 불균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다.
이 소설은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탐구하며, 독자에게 깊은 사색을 유도하는데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사실주의가 돋보이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대작들에 비해 비교적 짧지만(그러나 다른 작가의 장편소설에 비하면 긴 편이다), 그의 문학적 깊이와 심리적 통찰력을 보여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등장인물은 벨차니노프라는 자유분방한 중년의 독신남과 그가 한때 사랑했던 유부녀 나딸리야 바실리예브나의 남편인 바벨로비치이다. 그런데 작품의 첫머리에 두 남성의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나딸리야는 이미 폐병으로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작품은 주로 이 두 남성의 심리적인 대결(일종의 심리적 결투라 할 수 있다) 과정을 그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백야가 지속되는 삐쩨르부르그의 여름날, 신경과민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독신남 벨차니노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증까지 겹쳐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이 우울증의 원인이 바로 바벨로비치라는 남자의 의도적인 출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3개월 전 상처(喪妻)한 남자(바벨로비치)는 아내의 사후, 그녀의 유품 속에서 수많은 연애편지 뭉치를 발견함으로써,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을 배반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아내는 결혼 후 벨차니노프와 바가우또프라는 두 남자와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울러 혈육이라고 생각한 딸 리자마저 벨차니노프의 아이라는 것을 깨닫자 절망한다.
결국 바벨로비치는 증오와 원한, 또한 화해와 용서의 감정이 뒤엉킨 기묘한 심리 상태에서 복수에 나서고, 그 와중에 다섯 살의 무남독녀 어린 딸 리자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한다. 벨차니노프 또한 뒤늦게 리자가 자신의 혈육임을 알고 그녀를 통해 새로운 정화된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것 역시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 두 사람은 애증의 관계를 계속하며 대결을 이어가는데 바벨로비치는 충동적으로 벨차니노프를 살해하려다 실패한다. 결국 그들 두 사람은 나름대로의 의미 없는 총결산을 하고 헤어진다.
그 후 2년이 지나 우연히 어느 지방의 기차역에서 벨차니노프와 바벨로비치가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바벨로비치는 새로 결혼한 아내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데(과거, 벨차니노프가 그랬던 것처럼) 정부(情夫)로 보이는 창기병(槍騎兵) 장교가 그녀 옆을 지키고 있다. 결국 바벨로비치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타성적인 삶을 살고 있다.
여기서 독자는 『영원한 남편』이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고차원적 심리 소설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어딘가 체호프나 모파상과 같은 요소가 내재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인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플레이보이 벨차니노프와 ‘영원한 남편’이라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바벨로비치는 각기 다른 형태로 자신들의 생을 살아간다. 그들의 삶에서 어떤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해결책도 개입되지 않는다. 『영원한 남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자주 그러했듯이 인간의 양상, 특히 모순과 변환 속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단조로운 구성으로 담담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로, 농노 해방(1861년) 이후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작품은 철학자 르네 지라르가 '모방 -> 경쟁 -> 폭력'이라는 '모방의 삼각형 이론'의 모델로 삼았던 소설로 작품 속 주인공 바벨로비치가 경쟁자 벨차니노프의 행동을 모방하다가 어느 단계에서 경쟁하게 되고 이후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제시되고 있다.
♣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계층 간의 갈등과 새로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작품 속에 반영하며, 인물들의 갈등과 심리적 변화를 통해 당시 사회의 복잡성을 묘사했다. 이 시기는 도덕적 가치관이 흔들리던 시기로,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도덕적 혼란을 작품으로 묘사했다. 인물들의 도덕적 딜레마와 내면 갈등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도덕적 혼란을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철학적 관점은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이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과 복잡성에 관심을 경주했는데 그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죄책감, 복수심 그리고 도덕적 갈등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 그것은 도덕적 구원과 인간의 구속에 대한 문제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중요시하며, 그의 작품에는 종종 그리스도교적 구원과 죄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예외없이 그리스도교적인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 ) : 저명한 프랑스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 심리학자, 전 대학 교수이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난 지라르 교수는 1947년 파리 국립고문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반평생 넘게 살았다. 인디애나대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대학, 존스홉킨스대학, 뉴욕주립대학 등에서 철학, 문학, 종교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쳤다. 1981년 59세 때 스탠퍼드대학 불문과 교수로 임용된 이후 40여 년간 프랑스어문학을 가르쳤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았다. 첫 책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욕망의 삼각형 이론으로 소설 속 인물을 분석하면서 문학평론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지라르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한 모방 욕망을 갖게 된다고 보았으며, 주체와 타자, 욕망의 대상 등 세 요소의 영향 관계를 가리켜 '욕망의 삼각형'이라고 명명했다. 이 밖에 <폭력과 성스러움>(1972),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1978), <희생양>(1982) 등 3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1973년 <폭력과 성스러움>으로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단 40명만 선정하는 프랑스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꼽혔다. 이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동료인 미셸 세르(Michel Serres)가 지라르에게 ‘인문학계의 다윈’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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