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장편소설 『전야제(前夜祭)』
서기원(徐基源. 1930∼2005)의 장편소설로 1961년, 1962년 [사상계]에 2부로 발표된 작품이다.
6ㆍ25전쟁이 초래한 윤리적 파탄과 인간성의 상실을 주제로 한 <암사지도>로 주목을 받은 서기원은 전쟁의 부조리한 상황, 가치관의 전복, 기존질서의 파괴 등을 적나라하게 분석, 묘사함으로써 전후파(戰後派)의 기수가 되었다. 날카로운 문체와 지적 통찰력으로 상이군인ㆍ제대병ㆍ창녀 등 낙오자를 통해 현실을 투시한 그는 1960년대에 들어 두 개의 방향으로 의식을 확산시켰다. 하나는, 이 같은 참담한 현실을 초래케 한 근대사에 대한 검증이며, 또 하나는, 더욱 폐쇄ㆍ공포화하는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 동학군을 테마로 한 <혁명>, 개화파의 기수인 김옥균의 생애를 추적한 <김옥균>, 그리고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검토하는 <이조백자 마리아상> 등 장편 역사소설이 전자의 소산이며, <사지 연습> <반공일> <아리랑> <오산> 등 단편이 후자의 계열이다.
단편소설『전야제(前夜祭)』는 작가의 초기 문학적 테마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역사에 대한 관찰은 한국 전통사회의 폐쇄성ㆍ정체성의 발견과 그것을 타파하려는 근대화 혁명의 불행한 실패이며, 현재에 대한 분석은 이 같은 폐쇄성이 현대 정치의 메커니즘으로 강화ㆍ조직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기관원이 등장하는 몇몇 단편들은 따라서 정치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개인의 양심과 권력의 음모, 인간의 자유와 지배기구의 허위를 대결시켜, 정치적 폭력과 권력의 전단성(專斷性)을 고발하고 있다. 실험적인 수법에서,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적확한 분석으로 문제를 일으킨 단편 연작 <마록열전<이 거둔 성과는 그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천착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작가는 우리 사회가 그 사회 구조나 인간의 근원적 심리 상태 측면에서 봉건적인 체제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확신을 명백하게 제시해 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ㆍ4후퇴 직전 한창 전쟁이 치열하던 무렵. 학도병인 김성호 육군 일병은 원성으로 출장을 간다. 명목은 공무 연락차지만 실은 채 소위의 봉급을 가족에게 전하는 것이었고 고아나 다름없이 된 성호 자신은 친구 영규를 만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성호는 원성에 닿자 영규부터 만난다. 영규는 폐를 앓고 있는데,
“나는 이상한 모순 속에 끼어 있는 셈이야. 몸이 성하면 군대에 가야하고 군대를 빠지기 위해서는 이대로가 좋단 말야.”
라고 고백한다.
성호가 영규를 동반해 채 소위네 가족을 찾아갔을 때 그들을 맞은 것은 채 소위의 유일한 가족이자 여동생인 지숙. 성호는 지숙을 처음 보는 순간 여자로 향하는 본능이 일어남을 느낀다.
부대로 돌아온 성호는 줄곧 맡아오던 BAR 사수역에서 벗어나 신역이 훨씬 덜한 채 소위의 연락병 임무를 맡게 되지만,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유는 사회에 나가면 같은 대학생 신분인 채 소위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창피해서다.
적의 공격을 받은 날, 성호의 소대는 사수(死守)의 각오로 고지를 지켰다. 그러나 적의 인해전술로 해서 포위가 되었고 성호는 포로가 된다.
한편, 영규는 ‘질식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등이 포함된 감정을 안고 지숙을 찾아간다. 그리고 친해진다.
포로가 된 성호, 그는 북송되던 중 탈출에 성공했고 사선을 돌파, 원성에까지 왔지만 귀대할 생각은 아니다. 그는 자기 소속 부대에서 전사자로 처리되었을 것을 짐작했고 군대 생활을 계속할 생각이 없는 거다. 성호는 우선 영규네로 찾아든다. 영규는 성호의 생환을 자기의 소생 이상으로 기뻐하며 채 소위가 잠깐 휴가를 받아 누이에게 와 있음을 알린다.
성호는 지숙에로 향하는 마음이 앞서 채 소위 앞에 나타난다. 채 소위는 성호의 귀대를 굳이 권하지 않은 채 부대로 돌아가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는다.
성호가 누리는 도피의 날들, 그것은 한없이 계속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영규네 집 형편도 그를 계속 도와줄 만하지 못하였다. 전선은 아군 측에 불리해지고 피난이 시작되는 무렵, 성호는 지숙을 소유했고 영규에게 함께 피난길에 오를 것을 권유한다. 영규는 처음에 마다하다가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피난 준비를 한다.
이 작품은 학생으로 입대, 전쟁에 대한 회의와 좌절감 사이를 방황하면서도 군인으로서의 냉엄성을 유지하는 인텔리 상호,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과 병을 고쳐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택일하지 못한 채 의지를 잃어 가는 그의 친구 영규, 교활한 직업군인 이 중사 등 전후(戰後)의 대표적인 세 사람의 개성을 대립시켜 한국전쟁의 무의미와 한계상황 속에 몸부림치는 의식의 갈등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암사지도> <이 성숙한 밤의 포옹>과 같이 전후세대(戰後世代)의 좌절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후자의 두 단편이 전쟁이란 충격적 재변(災變)이 일으킨 내적 파탄, 기성 질서의 붕괴를 묘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쟁의 의미와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 속의 의식을 성찰하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한국 사람들끼리 흘리는 혈류(血流) 속에 서양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의 끈끈한 피가 뒤섞이고 있는 이 전쟁의 착잡한 양상은 미리 마련된 역사의 숙명으로 체념할 수밖에 없다’라는 데 동의하면서 ‘승패를 초월해서 자신을 투신할 수 있는 갈망’이 없음을 고통스럽게 확인하고 있다.
♣
서기원의 <암사지대>는 한 집안에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상관(相關)하며 사는 이야기다. 두 남자도 여자도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것은 전쟁 직후의 퇴폐, 관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젊은이의 생태 그대로라는 점에서 1953년 환도 후 우리나라 사회 풍조를 표출시킨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전야제』의 주제도 전쟁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방황하는 젊은 지식층의 생태라는 점에서<암사지대>와 같다.
작품 속에서는 영규, 성호 모두가 전쟁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 영규가 자기 병 치료에 적극성을 띠지 않으며 군대를 기피하는 심사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동족을 죽이는 전쟁엔 참가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게 한다면 이것을 빼놓고 달리 기피할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심정이었고, 병을 고친 뒤 기피자의 지하실로 숨게 될 고통보다는 지금의 이 기묘한 평균 운동이 한결 수월한 것만 같았다.]
성호의 생각도 영규와 별다름이 없다. 성호는 학도병. 마음만 먹으면 장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장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몇 달이라도 일찍 제대해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서다. 기피자라는 자책감 때문에 풀 죽어 있는 영규에게 던진 성호의 반문, 그것은 작가의 의사 그대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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