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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사회 현상인 자살 『자살론(自殺論 : Lesuicide)』

by 언덕에서 2014. 11. 20.

 

 

사회 현상인 자살 『자살론(自殺論 : Lesuicide)』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1(EmileDurkheim, 1858~1917)은 1897년에 발표한 저서 『자살론(Lesuicide)』에서 "자살은 엄연히 사회 현상이며 자살의 원인 역시 사회적"이라고 했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통계 자료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정신병이나 신경쇠약증 같은 것이 자살(自殺)과 확정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유전적 요소, 개인의 체질, 밤낮의 길이, 계절에 따른 온도의 영향 등 다양한 신체적 물질적 조건들이 자살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밝혔다.

 뒤르켐은 이 책에서 매우 개인적인 듯이 보이는 자살과 같은 행위가 사회 체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밝혔다. 그때까지 자살에 대한 사회적 요인을 인종이나 기후, 혹은 정신적 장애로 설명했지만, 뒤르켐은 자살을 사회적 사실(social fact)로서, 이는 다른 사회적 사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살이 결코 개인적 행위의 단순 총합이 아니었다.

 뒤르켐은 자살에 대한 프랑스 공식기록으로부터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자살 가능성이 높음을 알아냈다. 여성보다 남성이,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인이, 가난한 자보다는 부자들이, 기혼자보다는 미혼자들이 자살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아가 자살률이 전시에는 낮아지고 경제적 변화나 불안정한 시기에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통해서 그는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힘이 자살률에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과 사회 결속의 두 가지 유형인 사회 통합과 사회 규제에 연관시켜 설명했다. 즉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에 강하게 통합되어 사회규범의 규제에 따라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조절하는 사람들이 자살할 가능성이 더 낮다고 보았다. 그는 통합과 규제의 유무에 따라 자살에 네 종류가 있다고 봤다.

 

 

 

 

 소설가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 노량해전2의 이순신이 적탄에 맞은 죽음을 자살로 간주한다. 그가 위치한 전장의 북으로는 난을 피해 쫓겨 간 무능한 조정과 이순신을 질투하는 왕이 있고, 동으로는 히데요시의 정치적인 칼이 있으며, 서로는 명나라가 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남쪽 바다에서 이순신은 죽을 자리를 찾는다. 북의 조정과 동의 히데요시 그리고 서의 명이 모두 그곳에서 명분을 찾고 있음을 알기에 그 허깨비 같은 명분들의 소실점으로 그는 자신의 죽음의 계획을 세운다. 장수로서 나라를 구했음에도 전쟁의 와중에서도 선조는 곽재우3, 김덕령4 등 전쟁영웅들이 향후 그의 위상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약을 내리거나 옥사시킨다. 이순신은 종전 후 왕이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기로 한다. 이순신의 자살설이 맞다고 할 때 어찌 보면 그의 자살은 숙명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이기적 자살 :

 일상적인 현실과 좀처럼 타협 또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살이 이 경우에 해당하며 정신질환자의 자살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기적 자살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경우, 그러니까 개인주의적 성향이 전반적으로 팽배해있는 사회에서 보다 자주 일어난다.

 뒤르켐은 개인의 자아가 사회와 충돌하고, 그 사회와 개인의 유대관계가 약해질 때 이기적 자살이 일어난다고 봤다. 자살의 원인 중 가장 흔하다. 공동체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공동체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 자신 속으로 도피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자살이다. 계속 이어지고 있는 연예인 자살이나 사회규범의 중압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입시생의 자살도 이기적 자살이다. 

 

2. 이타적 자살 :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집단에 지나치게 밀착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집단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닌 사회에서 보다 자주 일어난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를 몰고 미군 군함으로 돌진했던 일본군 자살특공대(가미가제)가 있다.

 사회에 대한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할 때, 즉 사회와 너무 밀착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이다. 집단을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는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한ㆍ일합방에 반대해 자결한 애국자들, 종교를 위해 자신을 버린 순교자 등이 이타적 자살의 대표적 경우다.

 

3. 아노미적 자살 :

 아노미5란 무규범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이나 사회 규범이 혼란 상태에 빠졌을때 보다 자주 일어난다. 따라서 서로 다른 가치 규범이 뒤섞여 있는 사회, 급격한 변동의 와중에 있는 사회에서 아노미적 자살이 보다 자주 일어난다.

 `아노미`란 사회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무너진 혼돈상태를 뜻하는 말로 뒤르켐이 처음 사용한 용어다. 아노미적 자살은 갑작스러운 전쟁이나 자연재해, 경제공황, 가치관 붕괴 등에 의해 일어난다. 경제공황으로 주식이 대폭락하자 자살을 선택하는 투자자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 국가가 멸망하거나 전쟁에서 패할 때 나타나는 자살도 아노미적 자살에 해당한다.

 

4. 숙명적 자살 :

 사회가 과도하에 욕망을 억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절망 속의 자살을 낳는데, 노예의 자살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아노미적 자살과는 반대로 사회적 억압이 너무 강할 때 일어난다. 봉쇄와 억압에 못 견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살이다. 노예나 죄수의 자살이 대표적이다.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의 유형을 위와 같이 네 가지로 분석한다. 모든 자살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현상이라고 진단한 그는 자살자와 사회와의 관계를 축으로 분류 기준을 만들었다.

 뒤르켐의 저서 『자살론』이 나오기 전 자살은 개인적 문제에 불과했다. 자살은 유전적 결함이나 정신질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개인적 선택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뒤르켐은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개념을 학계에 정착시켰다.

 "어떤 현상의 원인은 개별적인 사례만 관찰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원인은 개인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사건보다 더 높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윤리철학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뒤르켐의 사회학적인 사상은 중요한 박사학위 논문 <사회분업론>(1893)과 <자살론>(1897)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윤리구조와 사회구조는 기술과 기계화의 출현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분업 때문에 노동자들은 서로 더욱 소외되는 동시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생산물 전부를 혼자서 만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가 속한 문화에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더 적은 것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의 결단으로 생명을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사회적인 힘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에밀 뒤르켐의『자살론』은 자살에 대해 현대인이 궁금해 할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고 있다.

 사회학의 고전이 된 이 책은 19세기 유럽의 사회문제를 뛰어넘어 현대인의 질병을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방대한 자료와 통계를 기초로 분석한 자살의 이유와 의미를 실증적인 논증을 통해 사회학적으로 자살에 접근하고 있다. 가난과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 권태와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 심지어 명예를 위해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구조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뒤르켐은 특히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이를테면 신경쇠약 등의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할 것이라든지, 자살을 막으면 그 폭력성이 살인으로 연결된다거나, 경제 부흥보다는 경제 위기 때 훨씬 자살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 등을 엄격한 자료의 비교와 분석을 통해서 바로잡는 사회학의 고전이다.


 

  1. 프랑스의 사회학자, 교육학자.콩트(Auguste Comte)의 후계자로서 실증주의사회학의 대표자.저서 ≪사회분업론≫(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1893), ≪자살론≫(自殺論, 1897) 등.[네이버 지식백과] 뒤르켐 [david Emile Durkheim]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본문으로]
  2.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이다.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났고, 이순신도 이때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네이버 지식백과] 노량해전 [露梁海戰] (두산백과) [본문으로]
  3.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이다.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일 것이다. 그 표현대로 곽재우는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起義- 의병을 일으킴)했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했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1593년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군을 격퇴했으며, 조정으로부터 종군명령과 함께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진해·고성 사이에서 왜군과 대치하며 영남 서부지역을 방어했다. 뛰어난 기습작전으로 왜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혀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의병장의 하나가 되었다. 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난을 진압하기 위해 진주로부터 운봉까지 진군하다가 난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체포된 반군의 무고로 이몽학의 난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서울로 압송되어 20여 일 동안 6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숨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덕령 [金德齡]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3.30, 가람기획) [본문으로]
  5. 사회적 규범의 동요·이완·붕괴 등에 의하여 일어나는 혼돈상태 또는 구성원의 욕구나 행위의 무규제 상태.[네이버 지식백과] 아노미 [anomie]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