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金正喜.1786.6.3.정조 10∼1856.10.10.철종 7)의 그림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1844) ]
고사 소요란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 중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원나라 문인화풍의 간결한 필치가 엿보이기도 하는 데, 작품의 완숙미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이다. 여느 그림처럼 가슴 속에서 붇받치는 감동에 밀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그려진 듯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다.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이니다.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이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다. 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사의 전형적인 난화이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많이 그렸는데, 대원군도 그에게 난 그림을 배웠을 정도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 제주도의 한란을 많이 관찰하고,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의 힘찬 난을 보면, 꼿꼿한 그의 기개가 보여지는 듯 하다.
[ 영영백운(英英白雲) (1844)]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는 발문이 오른 쪽에 적혀있다.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다가 외로움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허허로움마저 느낄 수 있다. 제주 유배 중에 기거하던 자신의 집을 그렸다.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다.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이다. “난초꽃과 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김정희. 조선 말기 고증학자(考證學者)ㆍ금석학자(金石學者)ㆍ서화가ㆍ서도가(書道家).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ㆍ추사(秋史)ㆍ예당(禮堂)ㆍ시암(詩庵)ㆍ과파(果坡)ㆍ노과(老果) 등. 본관 경주. 이조판서 노경(魯敬)의 아들. 그의 어머니 유씨(兪氏)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박제가(朴齊家)에게서 수업하고, 1814년(순조 14)에 문과에 급제, 벼슬이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20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세에 거유(巨儒)로 명성을 떨치던 완원(阮元)ㆍ옹방강(翁方綱) 등과도 막역하게 지냈으며, 환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초해서 완당에게 기중까지 하였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특히 유배 기간 중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배 기간 동안 화가이자 제자인 소치 허유(1809~1893)가 세 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유명하다. 소치는 충심으로 스승인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1840년(헌종 6)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 1851년(철종 2) 헌종묘천(憲宗廟遷) 문제로 북청(北靑)에 귀양 갈 때, 66세의 노구(老軀)로 귀양생활이 도합 13년이나 되었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수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유배 기간 중인 1842년 11월 13일, 유배생활 내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서울 용산 한강 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녔던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특히 금석(金石)ㆍ도서(圖書)ㆍ시문(詩文)ㆍ전예지학(篆隸之學)ㆍ묵화(墨畵)에 뛰어났고, 서법도 독창적인 추사체(秋史體)를 이룩한 명필가로 유명하다. 학문에 있어서는 고증학(考證學)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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