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주왕산 여행
지난 주말, 1박 2일의 일정으로 경북 청송에 다녀왔다. 원래 단풍이 좋을 10월 말로 계획하였으나 월말월초 연휴가 끼어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오지로 강원도의 정선, 영월을 꼽는 이 많지만 경북의 봉화, 영양, 청송도 그에 못지않다.
고교시절 설악산 수학여행 가면서 청송의 주왕산을 들른 적이 있고,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도 친구들과 배낭을 메고 등산한 기억이 조금 남아있다. 그리고 신혼시절에 선배부부의 차를 타고 아내와 찾은 적이 있으니 이번이 네 번째인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속도로는커녕 지역마다 그 흔한 4차로 도로 하나 없다. 청송은 ‘육지 속의 섬’이며 제대로 된 공장 굴뚝 하나 찾을 수 없다. 옛 선현들은 청송을 ‘신선의 고장’이라고 했다. 과거 명현 거유들이 타락한 속세를 버리고 심신수양과 학문을 위해 청송에 터를 잡았다. 그래서 지금도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온전하게 남아서 시선을 끌고 있고 국립공원 주왕산은 청송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왜 산 이름이 ‘왕’자가 들어간 주왕산일까?
현재 주왕산의 지명 유래 전설은 당나라 때 후주천왕을 자처해 반란을 일으킨 '주도'(주왕)가 신라로 잔병을 이끌고 와 주왕산에 숨어들었고, 당나라가 주도를 치기 위해 신라의 왕에게 명해 왕의 명을 받은 마 장군이 주왕산에서 주도의 최후를 맞게 했다는 스토리가 크게 알려져 있다.
주왕산 매표소를 지나 주왕산의 대표 사찰인 대전사를 뒤로 돌아 30분 정도 걸어가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 터를 잡은 절 주왕암이 나온다. 주왕암 뒤편으로 들어서면 양 절벽에 짓눌릴 만큼의 깊고 좁은 협곡이 나오고 협곡을 따라 숨 가쁘게 한참 올라가면 ‘주왕굴’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시야에 잡힌다.
주왕굴은 주왕산 역사의 첫 시발점인 ‘주왕'(周王)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주왕산은 '주왕'이라는 사람의 호칭에서 따왔다고 한다. 전국에 수많은 산이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딴 산은 거의 없다. 그만큼 주왕산은 '주왕'과 절대적 관련이 있는 것이다.
주왕산은 주왕이 머물렀다고 해 ‘주방산’, 주왕이 은둔했다고 해 ‘대둔산’으로도 불리고, 주왕과 관련된 지명 유래가 지천에 깔려 있다.
주왕이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 주왕의 군사가 훈련을 했다는 연하굴, 주왕의 시체를 화장했다는 범굴, 최후를 마친 주왕과 그 군사들의 피가 주방천에 흘러 그 이듬해 검붉은 반점의 수달래가 주방천 가에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전설, 주왕의 장수가 지휘를 했다는 장군암,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지은 절 백련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절 대전사 등이 그러하다.
주왕이 마 장군과의 싸움이 치열할 때 잠시 말에서 내려 쉬었다고 해 하마, 마 장군과 주왕이 전투를 벌일 때 마 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라고 해 진골 등 주왕산 인근 마을 유래에도 주왕의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그 옛날 청송주민들에게 주왕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정말로 당나라 지방 호족인 주왕이 요동과 지금의 북한 땅을 거쳐 수만리 떨어진 주왕산에 숨어들었을까? 주왕굴 앞 주왕암의 안내판조차 소위 ‘중국설’을 적고 있으니 과연 주왕산의 주왕이 중국인이었을까?
조선 중기 청송사람인 매화 서활이 적은 주왕사적 발문에선 주왕이 중국을 배반한 역적이고, 신라왕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도록 하였다면 마땅히 동국의 역사에 나타나야 하는데 아직 듣지를 못하였다고 했다. 실제로 전통 사서인 삼국사기나 고려사, 세세한 사건이라도 기록했던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중국인이 쓴 십팔사략에도 기록되어 않으니 의아할 따름이다.
자료를 뒤져보니 주왕산삼암기에는 주왕산의 주왕에 대해 옛날 신라의 풍모가 걸출한 왕자가 명주(지금의 강릉)에 은거해 살다가 죽어 '주원왕'이라고 했고, 왕자 때 지금의 주왕산에 은거해 그가 바로 ‘주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왕자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7대손인 명주군왕 김주원이다. 그렇다면 주왕은 중국인이 아닌, 신라의 왕족인 김주원 또는 신라 말 혼란기에 왕권 다툼 과정에서 난을 일으킨 김헌창(김주원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주왕산에 은둔했거나 청송주민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지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주왕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근거 자료는 없지만 주왕산과 청송 일대에는 지금의 지명 유래 등으로 미뤄 신라 말을 전후로 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있었고, 청송주민들이 당시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왕산 역사의 태동을 ‘중국의 것이냐, 우리의 것이냐’로 보는 문제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성리학과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조선시대가 원인제공자가 아닐까 한다. 주왕산은 조선에 이르러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등 당대의 석학들이 주왕산의 기품을 글로 담아냈고, 수많은 명현 거유들이 주왕산에 머물렀다. 그들이 볼 때는 중국의 지방정권의 실력자가 살기를 원했을 정도로 경치와 인심이 좋은 곳이라는 칭송으로 주왕산이라고 칭했을 뿐이다.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진 고려와 신라 때 역시 주요 인물들이 주왕산에 머물렀고, 주왕산에 지금의 지명과 전설의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주왕산에 관한 중국관련 역사는 근거가 없다.
주왕산을 알리는 안내판부터 잘못되었다. 작은 것에서부터 왜곡되는 우리의 역사는 씁쓸하다.
여행의 재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지역의 장터를 구경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다. 청송군은 청정지역이라서 그런지 사과, 버섯, 나물, 채소 등이 눈에 띈다. 대도시 마트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싸리버섯, 석이버섯이 많이 나와 있어서 흥미로웠다. 과거 무역회사 다닐 때 부산지역의 보세장치장(보세창고)에 자사수입품 재고조사를 나간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부산지역의 보세창고는 만고(滿庫)상태여서 양산지역의 보세창고까지 임대한 적이 있었다. 양산통도사 인근의 보세창고에서 자사수입품 상태를 조사하고 있는데, 창고 내에서는 영세업자들이 수입한 중국산 고사리, 말린 파, 도라지, 버섯 등이 지천이어서 많이 놀랐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창고에서 멀지 않은 통도사 입구의 난전모습이었는데 창고에서 본 중국산 말린 나물들이 포장만 뜯은 상태에서 국산으로 팔리고 있었다. 허름한 시골 할머니들이 직접 채취했다며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속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지금도 나는 말린 농수산물에 대해서는 일단 의심하는 습관이 있다.
요즘 보기 드문 싸리버섯이다. 말리지 않은 버섯이다. ^^ 어릴 때 이 버섯에 쇠고기랑 간장을 넣고 조려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대단한 맛이었는지 지금도 '버섯'하면 나는 '싸리버섯'이 최고의 버섯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송이버섯을 파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갓(뚜껑)이 피어나서 우산처럼 된 송이 6개에 14만원을 불렀다. 꽤 큰 놈들이었는데 그 정도 가격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주왕산 입구의 식당가에서는 막걸리를 팔고 있다. 송이버섯 막걸리... 한 잔에 천원... 가만 생각해보니 낮술을 마셔본 지도 몇 년 되는 것 같다. 이 날도 역시 마시지 않았다. 낮술을 마시면 쉽게 피로해 진다.
주왕산에는 '달기약수터'라는 유명한 약수터가 있고 그 약수로 밥을 지으면 노란색 밥이 된다고 하는데 아마 약수 속의 유황성분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달기약수로 끓인 삼계탕(닭백숙)이 유명하다. 대도시에도 ‘주왕산 삼계탕’이라는 프랜차이즈 음식이 있는데 여기에서 연유한다. 소설가 백파 홍성유가 쓴 전국 맛집을 소개하는 책자에서도 접했는데 한 번도 먹어보지는 못했다. 주왕산에 온 김에 주왕산 백숙을 드디어 먹어보았는데 맛은... 그냥 백숙맛이었다.
주왕산 입구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남쪽에 저수지가 있다. 별바위골 끝자락에 있는 이 자그마한 호수가 주산지다. 사진작가들이 새벽이슬에 옷을 적셔가며 담고 싶어하는 곳이다. 주왕산국립공원 구역 안에 있다. 조선 경종 원년(1721년)에 만들어진 농업용 저수지로, 저수지 안에 왕버들나무 2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물에 잠긴 채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이들 왕버들도 이젠 늙어 기력이 쇠잔해 보인다. 새벽이면 주산지를 포위하는 물안개와 아랫도리를 호수에 담그고 선 왕버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태고의 신비를 담고 있다. 주왕산 산속에 있는 호수 주산지는 조선 숙종 때인 1720년에 쌓기 시작하여 경종 때인 1721년에 완공되었다. 길이 100m, 너비 50m, 수심 7.8m이다. 한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저수지 아래의 이전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호수 주변을 정리하고,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여성들에게는 항상 잔인한 김기덕의 영화... 그 영화도 그랬는데 그의 영화에 빠져들면서 김기덕은 남녀를 불구하고 모두에게 잔인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는 엄청 큰 호수로 보였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그닥 크지 않은 평범한 규모여서 의외였다.
벙거지를 뒤집어 쓴 저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다가다 주위를 보니 청송은 사과밭이 지천이다. 어린 시절, 사과밭이 있는 과수원 속에 집을 짓고 사는 꿈을 ... 그러니까 ... 과수원 주인이 되는 꿈을 안 꾸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능금이 빨갛게 익기도 전에 떠나가버린 사랑도 있었고...
차를 타고 라디오를 켜니 쫙 빠진 여가수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르고 시작하던 <I will survive>가 나온다. 다른 가수... <맨 인 블랙>에서 똥개가 부르던 <I will survive>도 좋았다. 로비 윌리엄스가 이 곡을 샘플링한 <Supreme>도 역시 그랬고. 빈 소년 합창단이 부르는 거룩한 버전은 마치 'B사감'에게 반항하는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처럼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진주'라는 여가수가 번안해서 부른 노래는 가사나 창법이 개차반처럼 느껴졌던 건 왜일까? Gloria Gaynor의 막강한 목소리의 원곡이 가장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2주 정도 지나면 가을이 더 깊어지고 초겨울 분위기가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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