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수
방정환 (1899 ~ 1931)
“조선의 여름이란 낮에는 몹시 따가워도 저녁때의 서늘한 맛이 정말 좋아요.” 밤중까지 푹푹 삶아내는 나라에서 살다가 온 일본 사람들이 저녁마다 이 말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만 살아서 이 특별한 맛을 모르고 지내지만 조선의 달빛(月色)이 특별히 밝은 것처럼 여름날의 저녁은 특별히 맑고 서늘하다. 여름날 저녁에 얼음집에 수그리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이 맛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고마운 저녁이 오기까지, 높다란 하늘에 아득히 떠서 서늘한 기운을 솔솔 내리는 별들이 나타나기까지 그때까지 얼마나 기다란 낮이냐. 널따란 길바닥과 지붕의 기왓장까지 불볕에 타고 있고 소도 말도 걸음을 걷지 못하고 더위에 늘어지는 뙤약볕에 오직 한 가지 바닷물보다 더 푸른색으로 쓰인 얼음 빙(氷)자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냐. 그것은 - 적어도 그 한때에는 - 마치 범람한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에게 구원의 배같이 고마운 것이다.
유별난 취미도 없거니와 쌉쌀하단 것 밖에 아직 맥주 맛을 모르는 나는 더우면 으레 빙수 집을 찾아간다. 대롱대롱 서늘한 소리가 나는 주렴 발을 헤치고 들어설 때 벌써 나는 더위의 물결에 언덕을 잡은 사람이 된다. 물이 흐르는 얼음을 손이 시려서 수건으로 싸쥐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이마의 땀이 도망을 한다.
스윽-스윽-
아이스크림보다도, 밀크셰이크보다도 정말 얼음의 맛을 즐길 수 있기는 갈은 얼음을 먹는 데 있다.
스윽-스윽-
그 얼음 갈리는 소리를 들어보라. 새하얀 얼음비가 눈발같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라. 벌써 등덜미의 땀이 다 기어 들어가지 않았느냐.
우박이나 싸라기같이 거칠게 갈은 얼음을 돈 내고 먹는 사람은 잠시일망정 불행한 사람이다. 사알-살 갈아서 참말로 눈결같이 갈은 고운 얼음을 삽죽 떠서 혓바닥 위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씹을 것도 없이 깨물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혀도 움직일 새 없이 스르르 녹아버리면서 달콤한, 향긋한 찬 기운에 혀끝이 환해지고 입 속이 환해지고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가슴속 뱃속 등덜미까지 찬 기운이 돈다. 참말 빙수는 많이씩 떠먹기를 아껴하면서 혀끝에 놓고 녹이거나 빙수 물에 혀끝을 담그고 시원한 맛에 스르르 감으면서 기뻐하는 유치원 아이들같이 어리광 쳐가며 먹어야 참 맛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더워도 얼음 가는 소리만 듣고도, 눈결같이 갈려 흩어지는 것만 보고도 벌써 땀이 기어드는 것이니까 보통은 한 그릇이면 더 찬 것을 먹을 용기를 계속하지 못한다. 나는 그 눈결 같은 얼음을 혀끝 위에 놓고 어느 틈에 녹는가를 보려는 재미, 혀끝으로부터 입안 머릿속 가슴 배 등덜미로 술기운보다도 더 속히 전기같이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앉아 있는 재미에 한 그릇 먹고는 반드시 또 한 그릇을 계속하는 버릇이 되었다. 뼈가 저리게 어쩔 줄을 모르게 차가워지는 것만 아니면 몇 그릇이든지 이어 먹을 것 같다.
순회 강연차 평안도에 갔을 때, 오산학교에서 이야기하다가 기차 시간이 닥뜨려서 인사도 할 새 없이 강단에서부터 달음박질을 하여 8분 동안이나 뛰어 가고도 3분이 모자라서 급행차를 타지 못한 일이 있었다. 꼭 그 차를 타고 가야 할 터에 타지 못하였으니, 꼭 올 줄 알고 기다리는 곳에서 큰 야단이 날 것을 생각하니 통지라도 미리 해야겠어서 “전보” 하니까 “여기는 아직 우편소가 생기지 않아서 전보를 못 놉니다.” “그러면 전화라도!” 하니까 “전화도 우편소가 없으니까.” 하였다. 속으로 “이런 데서도 사람이 사는가.” 하였다. 전화도 전보도 못하는 곳에서 급한 병이 생기거나 뜻밖의 재변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위에 시달려 견디지 못하여 허위허위 얼음을 구하러 갔더니 “오늘 기차 편에 얼음이 오지 않아서 오늘은 없습니다. 내일이나 가져오면 있지요. 날마다 기차 편에 얼음을 가져다가 파니까요.” 기가 탁 막힌다. 기차도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곳, 아주 얼음을 생각도 못하고 온 여름을 지내는 시골을 생각하면 서울 같은 곳에서 마음대로 얼음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아, 해가 지자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코에 이마에 손에 땀이 솟는다. 철필을 던지고 빙수 집으로 가자. 얼음 가는 스윽-스윽-소리를 들으러 가자. (“별건곤“1928.7.)
방정환.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 등을 조직하여 소년운동을 주창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였으며,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저서에 《소파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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