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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우리 고대소설의 씁쓸한 이면(裏面) 『전(傳)을 범하다』

by 언덕에서 2011. 1. 11.

 

 

우리 고대소설의 씁쓸한 이면(裏面(傳)을 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작가 키류 미사오(桐生操, 1950~ )가 쓴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가 생각났다. 전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읽혀져 온 그림동화의 이면을 파헤쳤는데 원래 그림동화가 갖고 있던 공포와 잔혹성을 밝힌 탓이다. 키류 미사오는 13편의 동화를 통해 금단의 세계에 철저하게 감춰져 있던 그림동화의 진실을 밝혀내고 있는데 그림형제들의 초판 원고와 학자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상상력을 덧붙여 전혀 새로운 그림동화를 복원시켜 놓았다. 키류 미사오의 책은 그림형제의 그 유명한 초판본을 그대로 실었다기보다는 학계에 통용되고 있는 흥미있는 해석들을 덧붙여 그림동화를 재창작한 작품들이다. 재창작의 도구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신분석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해석이다.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고전 이야기들의 끝 자에는 '전(傳)'이라는 글자가 붙는다. 이 책은 그러한 우리의 고전 이야기 '전(傳)'을 현대의 논리에 맞추어서 재해석한 유쾌하기 짝이 없는 책인데 키류 미사오의 책과는 비교하는게 어울리지 않는, 격이 높고 학구적이며 재미있는 역작이다. 우리가 그간 편견 없이 읽었던 우리의 고전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일방적인 왜곡논리로 진행되고 회자되어 왔는지를 속 시원하게 파헤쳐주는 명저이다.

 

[전을 범하다] 작가 이정원 (李政沅)

 

 

그러니까 이 책은 교과서 속 진부한 해석에 묶여 있던 우리 고전소설의 잔혹한 속내를 파헤치며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새로운 시도의 전(傳) 해석서이다. 스스로 ‘옛 소설에 매혹 당했다’고 자처하는 국문학자이자 '서사 여행자'인 대학교수 이정원은 13편의 우리 고전소설을 ‘권선징악’이라는 굴레에서 해방시켜 욕망과 위선, 폭력과 일탈로 가득한 진짜 속내를 밝혀 내었다. 장화·홍련의 계모는 가해자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희생양일 수도 있고, 〈심청전〉의 본질은 '효'가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행행했던 '살인'이라는 거다. 

 저자 이정원은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과 같이 익히 유명한 고전소설에서부터 〈김원전〉, 〈김현감호〉, 〈황새결송〉처럼 상대적으로 낯선 고전소설에 이르기까지 총 13편의 다양한 고전작품을 풀어 헤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시도하는 전(傳)에 대한 재해석은 어쩌면 너무나도 점잖게만 읽어왔던 우리 옛 소설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실상 다르지 않은 현대인의 모순과 탐욕, 정치와 폭력을 생생하게 재발견하게 해 준다. 익숙한 전(傳)의 재해석에선 기존 문법과 가치관을 뒤흔드는 통쾌함을, 생경한 작품의 재해석에선 신선한 고전의 매력을 맛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책 『전을 범하다』는 ‘권선징악’으로 점철된 폭력적 해석을 거부하고, 우리 고전소설 속 욕망과 숨은 사연들을 들춰낸다. 저자는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과 같이 유명한 고전소설에서부터 〈김원전〉, 〈김현감호〉, 〈황새결송〉처럼 낯선 작품까지 폭넓게 넘나든다.

 우리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고전소설들은 신기하게도 모든 주제가 ‘권선징악’과 ‘충효열 사상’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모든 고전소설의 주제가 ‘권선징악’이라는 그 폭력적 시각은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이러한 시각을 근대라는 ‘계몽’이 붙여놓은 일종의 ‘스티커’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 스티커를 떼어버리고 나면, 수많은 전(傳)에 농축된 인간의 본능과 욕망,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보인다고 지적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장화홍련전

 이를 테면, 실제 살인사건을 토대로 지어진 〈장화홍련전〉 속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의 사연이 있다. 익히 ‘악독한 계모와 불쌍한 본처 자식’의 구도로만 읽힌 〈장화홍련전〉을 조선 후기 가부장제의 폭압 속에서 읽게 되면 우리는 징벌 당한 악의 현신 ‘계모’가 아닌, 철저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불쌍하고 힘없는 ‘후처’들을 만나게 된다. 정작 살인을 방조한 ‘진범’ 아버지는 ‘사악한 계모’라는 장치의 뒤꽁무니에 숨어버린다.

 

 

 

 현대 영화 <장화, 홍련>에서도 고소설에 내재된 상상력이 비슷하게 작용된다. 영화에서 동생 수미는 언니 수연의 죄책감이 불러온 환상이다. 그러므로 수미의 목소리와 모습은 오직 수연에게만 소통된다. 이런 폐쇄적 소통이 근본적으로 병든 아내를 둔 가장의 성욕을 위해 딴 여자가 들어올 수도 있는 가부장적 현실에 기인했다는 점에서 고소설과 일치한다.

 이처럼 그간 침묵했던 장화의 계모를 다시 이해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우리 옛이야기들을, 독자들에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박제된 고전(古傳)’이란 오명에서 구하는 일이 된다. 동시에 고전에 대한 새로운 독법은 옛 이야기가 갖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힘>을 발견하게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모여 전(傳)은 비로소 ‘한국적 서사의 원형’이자 ‘스토리 전쟁터’로서 원래의 지위를 되찾을 지도 모르겠다.

 

심청전

〈심청전〉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작품이지만, ‘효’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린 이 잔혹한 소설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해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심청전〉에서 ‘살인’을 발견하는 저자의 시각은 자못 공격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심청의 죽음을, 그것이 현상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호 합의된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희생으로 간주함으로 효 이데올로기에서 근원적으로 파생되는 혼란과 무질서를 관리한다. 죽음은 살해가 아니라 아비의 눈뜨기를 위해 부처님께 바쳐지는 고귀한 희생이 된다. ‘거룩한 도덕 교과서’ 혹은 ‘효의 상징’이라 칭송받는 이 작품의 본질은 마을 사람들과 심 봉사가 공모한 ‘심청 살인 사건’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적벽가

 삼국지의 전쟁이야기인 적벽가에서 파생된 이 소설은 적군 일곱에게 성폭행을 당하여 ‘반생반사’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폭행을 당하는 자의 인간적인 모멸감이나 성폭행하는 자의 야만성이 부각되는 동시에, 성폭행이라는 육체적 관계 맺음이 거의 물리적으로 재현된다. 이 혐오스런 광경을 통해 육체를 억압했던 전장 밖의 질서는 무너지고 오직 해소되어야 할 성욕의 정당성만 분출된다.

 

 

장끼전

 부인 까투리가 먹지 말라던 콩을 주워 먹고 끝내 비명횡사한 남편 장끼의 이야기이다. 〈장끼전〉은 저자에 의해 ‘어미의 사생활’이 담긴 은밀한 서사로 재탄생했다. 시선의 초점은 무능한 장끼의 죽음 이후에 맞춰진다. 미망인이 된 까투리 앞에 까마귀에서 기러기까지 ‘난다’하는 남정네 새들이 줄지어 청혼을 한다. 이본(異本)에 따라 청혼을 거절하기도 하고, 자결을 하기도 하지만 규방가사로도 전해진 이 작품의 구활자본에서 까투리는 또 다른 ‘홀아비 장끼’를 선택한다. 대체 그녀는 왜 나이 어린 부엉이와 돈 많은 오리를 거절하고 재차 장끼를 선택한 것일까? 저자는 이 소설을 고소설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욕망’을 등장시킨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녀는 ‘숫맛’을 알고, 그 재미를 살림의 재미로 뭉쳐내는 건강한 어머니다. 수많은 고전소설에서 반복된 못된 계모나 첩이거나, 혹은 남성 영웅의 전리품쯤으로 각인된 여성이 아니다. 이렇듯 〈장끼전〉에도 정제되지 않은 욕망과 삶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담겨 있다.

 

황새결송

 현대 한국 사회의 병폐를 되짚어 보게 하는 작품에는 〈황새결송〉도 있다. 반복되는 사법부 비리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짜릿한 진실에 파헤치는 송사소설들은 조선시대에도 인기가 제법 있었다고 한다. 송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황새결송〉은 ‘황새가 송사를 마무리 짓다〔結訟〕’란 뜻의 제목인데 묘하게도 ‘공정한 사회’라는 요즘의 슬로건, 그리고 그와 상반된 우리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돈 많고 ‘교제력’ 좋은 친척이 결국 정직하고 순진한 부자를 이겼다는 이 소설의 결말은 씁쓸하다.

 결국 〈황새결송〉에서 발견하는 재판에 이기는 비법은 진실이나 정의 따위가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분주하게 ‘교제’하고 재판관의 사돈 선물까지 챙겨 넣는 ‘작전’에 있다. 요즘 신문을 보는 느낌이다.

 

토끼전

 토끼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간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등장한다. 간이 육지에 있다고 속여 용궁을 탈출할 즈음의 토끼는 자라에게 복수한다. 자라를 삶아먹으면 용왕의 병이 낫는다고 용왕을 꼬드긴다. 충직한 자라는 눈물로 용왕에게 진실을 하소연하지만 어리석은 군주는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는다. 용왕은 목숨을 걸고 육지를 다녀온 공을 인정하여 별주부 대신 별주부 아내의 목숨을 요구한다. 별주부 부부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토끼에게 애걸하나 토끼는 그 대가로 별주부 아내가  토끼 자신에게 수청들 것을 요구한다. 그녀는 ‘열녀불경이부’의 도리를 들어 거절하나 목숨 앞에서 별도리가 없었다. 남의 아내에게 수청을 들으라는 토끼의 요구는 아무리 복수의 과정이라지만 씁쓸하다. 우리 고전 속의 인간들은 모두 이런 식이란 말인가? 더 웃기는 것은 그 다음이다. 별주부 아내를 취한 다음 토끼는 서둘러 용궁을 떠나는데 그때 별주부 부인의 편지가 도착한다. “지난밤의 정분을 잊지 못하겠으니, 어서 빨리 돌아와 자신과의 인연을 이어 달라…….”

 

 

 이 정도면 ‘사회적 약자’라는 아름도 참 허망하다. ‘우리는 모두 자기 좋자고 정의니 신의니 도덕이니 그런 것을 끌어다가 자기 이기심을 감추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물음은 거부할 수 없는 명제이다. 단지 오늘 내가 이 정치판에서 재수 없어 쓰러졌지만, 다음번엔 더 가혹하게 너를 쓰러트릴 텐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춘향전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어령도 비슷한 글을 쓴 것으로 기억한다.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라는 에세이집을 통해서 여성의 심리를 분석했는데 놀랍게도 공공연히 성도착증 증세를 보이는 춘향이를 지적했다.

 

 "나는 항시 어찌 이생이나 후생이나 밑으로만 된다는 법 있소? 재미없어 못 쓰겠소." 이렇게 말하자 이도령은 "그러면 너 죽어 위로 가게 하마. 너는 죽어 맷돌 웃짝이 되고 나는 밑짝이 되어 슬슬 돌아가자"고 말한다.

 

 

 

 

 우리가 청순녀의 대표선수로 생각했던 춘향의 실제 모습은 에로틱하기 짝이 없다. 성기 상징은 맷돌에서 다시 양다리 사이에 있는 '수룡궁(水龍宮)' 으로 옮겨지고 성교는 배타고 노 젖는 행동, 말 타고 달리는 행동으로 각각 유추되면서 그 사상(事象)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장면으로까지 옮겨진다. 이른바 말타기와 서로 업고 노는 성유희극으로서 러브 신은 절정에 달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치관의 붕괴로인한 혼란은 지속된다...

 

 작금의 시절이 흉흉하다. 아침저녁으로 포털 사이트의 메인은 아버지가 친딸을 성폭행하고, 아들뻘의 제자와 여교사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믿지 못할 뉴스들로 채워진다. 많은 이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탐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시된 박제된 고전들에 꼼꼼히 읽다 보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제되지 않은 비슷한 스토리들과 만나게 된다. 그 속에는 눈을 뜨기 위해 딸을 바다에 내던진 아비가 있고(심청전), 한때의 욕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젊은 청춘들과 잇속 계산에 바쁜 기생의 어미가 있으며(춘향전), 별주부 부인을 탐하는 토끼도 있고(토끼전), ‘영웅’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당돌하고 철없는 도사(전우치전)도 있다.

 각종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전자책으로 문학을 읽고 아이폰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옛 소설의 현대적 변주는 멈추지 않는다. 고전이야말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스토리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처럼, 저자는 계몽 근대가 주입한 고지식한 해석과 그를 고착시킨 우리 문학 교육에 반박하며 “과연 한 번이라도 우리 옛 소설을 제대로 감상해본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다. 그는 “새로운 스토리 찾기에 혈안이 된 전 세계의 문화 산업계는 앞 다투어 동·서양의 고전을 파헤치는데, 정작 국내 독자들이 수백 년 변모해온 우리 고전소설의 잔혹하고 서글픈, 발칙하고 유쾌한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해 아쉬웠다”며 집필의 동기를 설명했다.

 

 우리 고전소설을 다시 읽는 시도는 결국 인간의 적나라하고도 깊숙이 자리한 욕망과 마주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점잖게만 읽어왔던 우리 옛 소설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실상 다르지 않은 현대인의 모순과 탐욕, 정치와 폭력을 생생하게 재발견하는 경험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느낄 통쾌하고 짜릿한 기분이야말로 이 책 『전을 범하다』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 아닐까 한다. 삶이 허망할  때 우리에겐 아직 〈장화홍련전〉이, 〈김원전〉이, 〈토끼전〉이 있기에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닫고 통쾌하게 웃어넘길 수 있다.